이발소 깨어진 유리창에

책 꺼풀을 메기며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03. 2. 9. 07:57

책 꺼풀을 메기며

 

꽤 늦은 귀가길, 하마터면 잊을 뻔하였다.

딸아이의 초등학교 교과서 꺼풀을 메기기 위해

비닐가게에 들러 책꺼풀 비닐을 사오는 일을.

 

요즈음은 피가츄다, 무어다 하여 책꺼풀용 비닐 커버가 나오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투명한 비닐을 사와 일일이 잘라 책 꺼풀을 메긴다.

 

예전이 아버지께서 나에서 해 주셨듯이.

 

하기야 아버님이야 항상 묵은 달력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시거나,

혹은 돌가루 종이 (경상도 표현으로는 돌가루 조~)라 불리던

시멘트 푸대 종이를 가지고 책 꺼풀을 메겨 주셨다.

 

책을 싸는 날은,

배움이 목말라 계셨던 당신들께는 자식을 위한 즐거움과 기쁨의 하루셨다.

무딘 손가락이 쓱쓱 지날 때 마다 새책의 윤곽을 따라 종이에는 선이 생기고,

그 선을 따라 접으면 표지는 기억에 가물거리지만 책만은 깨끗이 쓸 수 있었다.

 

하기야 초등학교 시절의 책을 버린 것은

내가 대학을 마치고도 몇 년이 지난 후 였으니,

아버님의 책사랑은 사뭇 대단한 것이셨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책을 함부로 하랴?

 

오늘도 책꺼풀을 메기며, 옛 기억에 젖는다.

예전에 아버님이 싸셨던 그 방식대로 이제 딸아이의 책꺼풀을 메기며,

내 딸 역시 다음 어느날이면 또다시 책꺼풀을 쌀까, 생각해 본다.

 

책이 덜 귀하고, 서울에 올라오니, 교보문고나 종로서적 같은 곳에서 국정 교과서를 팔고 있었다.

지방에 있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아마도 아버님도 지금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실 것이다.

 

책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버님에게나, 그런 아버님의 책메기는 솜씨를 보고 자란 나에게나.

 

요즘 아이들도 국정교과서  새책의 그 하이얀 색깔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하기야 그림책보다도 수준 떨어지는 그림과 삽화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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