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최애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카톨릭적 소양이 전무한 나로서는 이 책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불교적 지옥 개념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나의 경우 언제나 now & here! (수행과 실천, 혹은 관조와 연습)만이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아날 학파의 자크 르 고프의 저작, '연옥의 탄생'은 오랜 숙제 같은 것이었다. 단편적인 이해로서의, 연옥이라는 개념의 등장, 대도(代禱- 煉禱)와 면죄부 그리고 이어진 종교개혁이라는 피상적 관심을 좀 더 깊이 파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하여 불교의 지옥과 윤회라는 개념까지 버무려 동과 서의 '서로 다름'이라는 데에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던 터였다. 어쩌면 그것은 저자의 표현대로 '죽은 자를' 기도하는 것과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불교 역시 지옥을 현실에 두지, 땅 하부의 제3의 처소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수메르산과 불교적 우주관은 8열8냉지옥을 하계(下界)에 두고 있는 것만은 일반적일 것이다. (서양에서는 지옥에 '내려가'는 것이지만 우리로서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떨어지'는 것은 공간의 이격-수평적으로나 수직적으로나-을 의미할 것이다.)
연옥신앙의 출현과 수세기에 걸친 형성과정은 기독교적 상상세계의 시공간적 구조의 실질적인 변모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그 변모를 초래한다. 그런데 시공간의 이러한 정신적 구조들은 한 사회의 사고 및 생활방식의 기반이다. 고대 후기로부터 산업혁명까지 지속된 긴 중세(4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의 기독교적 세계가 그러했듯이 사회가 온통 종교로 침윤되어 있을 때에는 저승의 지리 곧 우주의 지리를 변경한다는 것, 내세의 시간을 즉 현세의 역사적 시간과 종말론적 시간 사이의 관계를 변모시킨다는 것은 느리지만 근본적인 정신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삶을 바꾸는 것이다. (20쪽)
상징적 공간의 방위 체계에서 고대인들은 좌우의 대비에 우선을 주었으나, 기독교는 신 구약성서에 여전히 나타나는 이 대립항(지옥과 하늘)을 중요시하면서도 상하의 체계를 일찍부터 강화했다. 중세에는 이 상하의 체계가 사고의 공간화를 통해 기독교적 가치들의 근본적인 변증법의 방향을 좌우할 것이다. (24쪽)
1150~1250년경 서구 기독교 신앙 속에 연옥이 자리했을 때, 그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하나의 중간적 저승으로서 어떤 죽은 자들은 거기에서 시련을 겪으며 그 시련은 산 자들의 대도 (代禱)에 의해 단축될 수 있다, 라는 개념에 도달하기까지는 오랜 기간에 걸친 사고와 상상 작용, 신앙과 행위, 신학적 논쟁,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사회 심층에서의 운동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연옥에 대한 신앙은 우선 불멸성과 부활에 대한 신앙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죽음에서 되살아난다 할 때 그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무엇인가 일어날 터이니까. 연옥은 불멸성이 일회적인 삶을 통해 얻어지는 것일 때 어떤 인간들이 영생에 도달하도록 주어진 보완 장치였다. (28쪽)...
연옥의 존재는 또한 죽은 자들의 심판이라는 관념에 기초해 있다. ...연옥의 존재를 상정하는 심판이란 매우 특이한 것으로, 그것은 실상 이중적 심판 즉 죽음의 순간에 첫 번째 심판을, 세상의 종말에 두 번째 심판을 맞게 된다는 신앙에 기초해 있다. 그것은 이 두 가지 심판의 중간에 다양한 요인들에 따른 형벌의 완화 내지 단축이라는 복잡한 심리(審理) 과정을 둔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도화된 정의 관념과 형벌체계의 투영을 전제로 한다.
연옥은 또한 개인적 책임 및 자유의지라는 관념 즉 인간은 원죄로 인해 죄성(罪性)을 타고나지만 그렇더라도 각 사람은 자기 책임하에 지은 죄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다. (29쪽)
연옥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간적 장소이다.
시간적으로 그것은 개인적인 죽음과 최후의 심판 사이의 중간에 온다. (30쪽)...
연옥이란 또한 공간적으로도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위치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랫동안 그 양극의 인력 가운데 있었다. ...
마침내 정립된 연옥도 진정한, 완전한 중간은 아닐 것이다. 미래의 선택된 자들을 위한 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천국 쪽에 가까우며, 따라서 위쪽으로 따라 올라간 중간이 될 것이다. 그러한 연옥이란 봉건적 사고의 특징인 중심이 치우친 균형체제, 동시대의 봉신 제도나 결혼제도의 유형에서 보듯 대등한 관계이면서도 봉신은 영주에 예속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예속되는 평등 속의 불평등 체제의 일환이다. (31쪽) ... 그리고 사실 연옥이란 진정한 중간이 될 수 없는 것이, 천국이나 지옥이 영원한 데 비해 그것은 잠정적이고 과도적인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승의 시간과 공간과는 다르며, 중세의 이른바 경이로운 상상세계에 속한다. (32쪽)
논리적 수학적 구조인 '중간'이라는 개념은 중세의 사회적 정신적 현실들의 깊은 변모와 관련되어 있다. 권력 있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 성직자들과 속인들이라는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중간적 범주, 중간계급 내지는 제3계급을 도입하기 되는 것도 같은 필요에서 나온 현상으로, 변모한 사회를 반영한다. 그것은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그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는, 사회의 사고 편성에 있어 이원적 체제에서 삼원적 체제로의 이행에 해당하는 것이다. (32쪽)
연옥은 죽은 자들이 시련을 겪는 곳이다. 이 시련들은...혹열과 빙한으로 , 특히 불에 의한 시련은 연옥의 역사에서 으뜸가는 역할을 했다...이 신성한 불이란 대체 무엇인가? G. Van der Leevw의 지적에 의하면, "입문의례에서 그것은 지나간 삶의 기간을 말소하고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불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과도적 처소에 걸맞는 통과의례라 할 수 있다. (33쪽)...이 불은 젊음을 소생시키고 불멸을 주는 불이다. (34쪽)...이 유산에 비추어볼 때, 중세의 연옥 형성에 있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 정화하는 불 le feu purgatoire의 세 가지 특징이 밝혀진다.
첫째, 젊음을 소생시키고 불멸을 주는 불은 "통과하는 불"이다. ..."그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린도전서 3:15) 연옥은 분명 과도적 처소 (또는 상태)이며, 연옥의 상상적 여행들은, 상직적 통과이다. (35쪽)...
중세의 정화하는 불이 갖는 두 번째 특징은 그것이 우선적이고 심지어 배타적인 위치를 차지하기는 해도 일반적으로 물과 불의 이원적 이미지를 이룬다는 것이다. (36쪽)..."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태 3:11) (37쪽)...
고대의 종교 및 신화에서 불은 다중적이고 다양한 성격을 갖는다..."신격화하고 생명을 주는 동시에 징계하고 무화(無化)하는" 불의 이 다양한 양상 가운데서..."신적 존재의 상이한 측면들"을 보며 따라서 불의 다중적 외관을 신성의 단일성으로 환원한다. (38쪽)....
연옥이 성공한 이유들 중의 하나가 매우 오랜 상징적 현실들을 재현한 데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전통에 뿌리박은 것이야말로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있으니, 연옥이란 기독교의 새로운 관념이지만 이전의 종교들로부터 그 주요한 장치들의 일부를 차용한 것이다. 기독교의 체계 내에서 신적인 불은 의미를 달리하며 역사가는 우선 이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그는 활발한 변화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이 질료의 영속성에 주목해야 한다. ... 그것은 젊음을 되찾게 하고 불멸로 만들어주는 불을 가져다가 의례와 관계된 신앙이 아니라 신의 한 속성으로 만들었으니, 그 불의 사용은 인간의 이중적 책임에 의해 결정된다. 즉, 정화하는 불을 겪느냐 겪지 않느냐는 죽은 자들의 생전의 행위들에 달려 있으며, 정화의 기간을 얼마나 단축시키느냐는 산 자들의 열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40쪽)
나는 현대 카톨릭 신학에 있어서 연옥이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상태임을 모르지 않는다. ...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연옥 신앙의 성공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장소로서의 연옥 개념 및 그와 연관된 이미지들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44쪽) ...형성되어 가는 연옥의 몇몇 본질적 요소들 뒤에는 민중 전통이 존재하고 작용한다....연옥이 탄생한 시대는 또한 민간의 전승이 식자 문화에 가장 활발히 작용했으며 교회가 고중세에 파괴하고 은닉하고 간과했던 전통들을 한층 폭넓게 받아들인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 또한 연옥의 탄생에 기여했던 것이다.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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