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페르디난트 자입트- 자발적 빈곤을 통한 천국으로의 길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3. 4. 22. 15:15

페르디난트 자입트,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차용구 옮김, 현실문화

 

| 들어가며

 

수십 년 전부터 사람들은 정치사를 피상적인 관찰방법이라고 매도하면서 정치사 대신에 역사적인 삶에서 '심층적인' 추진력을 찾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사를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물론 정치적 생활의 우위를 말하고자 함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계는 정치적 유형에 의해서 가장 쉽게 파악될 수 있고 또 가장 잘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해왔고, 삶을 계획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가치있다고 생각한 인생에 대해서 어떤 희망을 품었는지가 중세의 정치 양상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를 근거로 지배권 행사가 정당화 되었다. (9쪽)

 

| 주인과 노예

 

'가난과 부유함'이라는 말은 그다지 일상적인 말이 아니었고 현실을 반영하는 대립 개념도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대신해서 '강자와 약자'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 대립개념은 전자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강자는 칼을 차고 다니는 주인이며 그는 자신과 타인을 보호할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이다. 그에 반대되는 개념인 '약자'는 재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무소유라는 의미에서 약자이다. (144쪽)

 

그리스도교는 악령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기여했고, 무기력함으로부터의 탈출을 시사했다. 또한 개개인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구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이 이름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교회의 성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택했다. 이를 통해 무기력한 이들을 보호하는 천상의 강력한 수호성인들이 이 세상에 강림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부터 주인과 노예라는 논리에 대항하는 강력한 역풍이 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50쪽)

 

| 수도사와 수도원

 

베네딕트 수도회의 회칙을 따르지 않았던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켈트족의 성직자로서 제사를 주관했을 뿐 아니라 학자와 시인으로 활동했던)...이교적인 사제이자 시인인 켈트족의 드루이드 마법사들과는 별도로 전사와 종사들 사이에 위치하는 별도의 사회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계층은 바로 종교적 지식인 계층이었다. 유럽대륙에서는...수도사들의 공동체가 있었다. 이로써 은둔자들의 거처와 수도원 사이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은둔생활은 특히 완전한 존재 유형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반면에 수도원 생활이 항상 공동체 안에서의 신에 대한 숭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쪽)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신의 노예상태로 영락(零落)할 수도 있었다. (154쪽)

 

그러나 귀족은 전쟁과 사냥을 위해서 태어났지, 결코 육체노동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되었다. 여기에는 로마적인 사고와 야만적인 사고가 결합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육체노동은 노예의 일로 경시되었다. 수도원에도 하인이 있었지만 수도원 공동체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육체노동은 생존을 위해서 필요로 되었다. 당시 수도원 문학작품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도 바울로의 문구가 자주 기록되었다.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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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보면 수도원 문화를 통해서 귀족과 하층민 사이에 위치하는 새로운 사회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는 수도원의 구성원이 지속적으로 귀족적으로 귀족 계층에서 충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들이 수적으로 귀족 계층을 능가하지는 않았다. 수도사의 노동은 결코 농노의 노동과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싸움으로 얼룩졌던 당시 상황에서 수도사의 삶은 귀족과 하층민의 특성 모두를 내포하고 있었다. (156쪽) 그 결과 제3의 새로운 특성이 형성되었다. 단순하고 치장되지 않은 수도사의 복장이 고위 귀족 자제들을 감쌌다. 수도사의 생활은 칼보다는 삽과 친근했다. 그들의 생활은 어떤 것에도 구속도지 않았고 사후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부인과 자녀를 가지지 않은 채 신이라는 최상의 주인에게 복종하는 종으로서 몇 시간 동안 진행되는 공동기도를 드렸고, 신의 찬미라는 본연의 임무를 밤낮으로 수행했다. 이렇게 해서 수도사들은 주인과 예속민이라는 이분적 구도에서 독자적인 사회계층으로 등장하였다. (157쪽) 개인적 무소유와 수도원 규율에 의거해 독선과 세속적 아집을 포기함으로써 이제 상층부 사람들이 공동체를 위한 봉사에 전념했다. 가장 부유한 사람들과 그 자녀들이 이러한 중간적 지위에서 지속적으로 빈민구호활동을 펼친 결과 독립적인 사회계층이 성장했다. (158쪽)

 

| 새로운 중산층

 

경작지 개간을 통해 설립된 촌락에서도 중산계층이 등장했다...방어력이 없던 촌락에 비해 도시들은 자치행정, 장터, 성벽이라는 세 개의 기본적인 권리를 이용해서 도시 중산층의 자유를 더 확실하게 보장했다. (246쪽)

 

| 가난한 사람들

 

초대 교회시대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본래 신자들의 수입의 10분의 1이 분배되었다. 오랫동안 교회의 십일조는 중세의 유일한 일반 조세였다. 이는 교회의 탁월한 조직력에서 나온 것이다. (278쪽)

 

그리스도 교도는 그리스도가 가난했다는 사실을 자각하려고 했으며,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선택함으로써 추종자가 되고자 했다. 11~12세기에 토지에 대한 속박이 사라지고 유동성이 늘어나면서 (281쪽) 새로운 도시의 흡입력이 강화되자, 빈곤과 부는 이제 수십만 명의 비귀족 계층 속으로 번져갔다. 그 결과 처음부터 권력을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거대한 인생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강자와 약자'라는 오래된 대립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도 한 쌍의 개념으로 묶어서 표현했던 '고귀함과 부유함'의 개념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인구증가의 숙명적인 결과인 가난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사람들은 '빈곤'으로 빠져들었지만 설교와 복음을 통해서 교화된 그리스도 교도들은 자발적 빈곤을 천국으로 가는 확실한 길로 인식했다. (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