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의 기록

울산 울기등대에서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19. 10. 14. 22:53

울산의 끝단에 있는 울기(蔚崎) 등대를 찾았다.

곶이라는 뜻과 급격한 비탈이라는 뜻이 있는 崎를 버리고 뜻없는 氣로 바꾸어 의미를 잃은 등대명이 일제강점기에 대한 피해의식을 실감케한다.


사실이지 등대 자체가 일제 강점의 산물이다.

(조선 정부가 일본의 체신 기사를 초청했다고 표현한다면 조선정부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표현이겠지만)

일본은 러일전쟁의사전 포석으로 1901년 연안 77개소의 등대건설지를 선정하고, 1902년 인천항로의 등대건설이 착수된다.

(비단 등대예정지 뿐 아니라 댐 건설지 200여곳 역시 일제 강점기 때 선정했다고 예전에 들었다. )

울기등대가 1906년 3월 등을 밝혔다고 해도, 여전히 일제의 조선반도 침략을 위한 작업임에는 변함이 없다.


조선이 국가가 아니라 양반 가문 연합체였다는 나의 확신은 여기서도 다름이 없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조선정부에는 공무아문 산하의 등대국이란 곳에 주사 4명이 배치되었다는 것을 보면

조선 정부는 정부가 아니라 그냥 가문 연합체에서 등대국이란 구멍가게 간판을 내건데 불과하다.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미군정이 들어서고도 등대업무를 관장하는 항로표지 업무는

그해 12월 26일까지 미군정청에 의해 일본인 등대원이 계속 수행했다.

기술인력을 양성하지 못하는 나라의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케한다.


조선조 사농공상의 뿌리는 여전하고,  계급사회임에도 평등으로 포장하며,

정치인들은 나라 안의 문제에 매몰되어 대중을 현혹시키며 먹고산다.

4차 산업시대라는 말을 쏟아내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이득에 봉사할 때에만 그러하다.


여기 울기등대에서 느끼는 생각의 자락이다.



앞쪽이 옛 등탑이고 뒷쪽이 새 등탑이다.

설명에 따르면, 옛 등탑은 당초 1층에서 주변의 소나무가 키를 키움에 따라 층을 올렸다고 하며

원래는 철근없는 콘크리트로 지어졌다고 한다.

(대왕암 공원 역시 러일전쟁 이후 주둔한 일본 해군이 식재한 해송림이다. 송림이 보존된 데에는 그런 연유가 있다.

인근 방어진 역시 일본의 이주어촌으로 고래잡이 또한 일제의 흔적임에 무관치 않다.)


나는 저 방향계에 눈이 갔다.

East의 반대편에 표시된 "O"는 Orient라는 설명이다. 혹은 Occidental 일지도.



울기 예 등탑의 입구이다. 울기등대라는 뜻 없는 개명이 보인다.

저 입구는 원래 있던 것이었나?

그러했다면 태극 문양은 대한제국의 오얏꽃 문양-풍개꽃이 맞는 말일텐데-이거나 일본의 국화꽃에서 덧씌웠을 것이다.

태극이 좌우태극으로 표현된 걸로 보아서는 해방 직후의 변형일지도 모르겠다. 언제고 확인해 보아야한다.



그보다는 사진 속 철계단의 저 디테일이 나의 눈길을 끈다.

저런 디테일을 만든 공학도의 솜씨가 부러웠다.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이 또한 일본인의 솜씨일 것이다. 이시바시(石橋絢彦)의 솜씨인가?)

멋스러움과 실용을 겸비한 아름다운 디테일이다.



옛 등대 옆에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의미하는 조형물이 있다.

차라리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한 장면을 옮기는 것이 포경산업과 어울릴 법이니

그저 바닷가라 노인과 바다를 만든 그 수준을 알 수 있다.

미국 문단을 유럽과 동등 수준으로 올려놓은 문학과 철학의 한 봉우리인 해양소설 모비딕을,

그것도 일본의 잔재인 포경산업과의 연계를 따져 설치하는 것이 마땅할 터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머굿대 꽃 (표준어로는 머위꽃)이 시절의 한 때를 가늠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