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游曰:「敢問天籟。」子綦曰:「夫吹萬不同,而使其自已也。咸其自取,怒者其誰邪?」
감히 묻건데, 하늘의 피리란 무엇인가? 무릇 피리를 분다는 게 만 가지로 서로 다르나 그 자신에 따라 시켜진 것이다.
모두 취한 바를 따르는 것이지만, 기운을 일으키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若有真宰,而特不得其眹。可行己信,而不見其形,有情而無形。
만약 참된 자기가 있다고 해도 그 흔적을 얻지 못하고,
자기를 뚜렷하게 행하기는 가능해도, 그 형태를 볼 수 없고,
생명의 실체는 있으되 형태는 없다.
道通為一。
其分也,成 也;其成也,毀也。凡物無成與毀,復通為一。唯達者知通為一,
為是不用而寓諸庸。庸也者,用也;用也者,通也;通也者,得也。適得而幾矣。
因是已,已而不 知其然,謂之道。
도를 통하여 하나가 된다. 쪼개짐은 곳 이뤄지는 것이고, 이뤄짐은 곧 훼손되는 것이다.
무릇 사물에는 이뤄짐도 훼손됨도 없이 다시 도를 통하여 하나가 된다.
오직 다다른 이만이 도를 통해 사물이 하나 됨을 알아, 이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평소대로 둔다.
평소대로 둔다는 것은 곧 쓰임이 있는 것이고, 쓰임이라는 것은 통하는 것이요, 통하는 것은 얻는다는 것이다.
마침 얻는다면 도에 가까운 것이다.
평소대로 맡겨둘 뿐, 그러한데도 그 그러함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를 일러 도라고 한다.
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
그러므로 성인은 시비에서도 조화롭고 세상의 균형에서 쉰다. 이를 일러 양행이라 한다.
物與我無成也。是故滑疑之耀,聖人之所鄙也。為是不用而寓諸庸,此之謂 「以明」。
나와 더불어 사물 역시 이룸이 없다. 이런고로 흐릿한 속에서의 빛남을 성인이 없애려는 바이다.
사용하지 않고 평소대로 둔다는 것을 밝음에 따른다고 일컫는다.
天地與我並生,而萬物與我為一。
천지가 나와 더불어 나왔으니,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하나를 이룬다.
夫大道不稱,大辯不言,大仁不仁,大廉不嗛,大勇不忮。
무릇 큰 도라는 것은 이름지을 수 없고, 큰 분별은 말로 할 수 없으며, 큰 어짊은 어질지 않음이고,
큰 청렴은 또한 겸양하지 않으며, 큰 용기는 남을 거스르지 않는다.
道昭而不道,言辯而不及,仁常而不成,廉清而不信,勇忮而不成。
도가 밝아지면 도가 아니며, 말의 분별은 다다르지 못하며, 늘 어짊은 이루지 못하고, 청렴은 믿음을 주지 못하며,
용기가 거스르면 이룸이 없다.
五者圓而幾向方矣!故知 止其所不知,至矣。
이 다섯가지가 둥글다지만 모나기가 쉽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그 곳에 그칠 줄 안다면 다다른 것이다.
孰知不言之辯,不道之道?若有能知,此之謂天府
말로 분별하지 못하고 도(道)로 도를 표현하지 못함을 누가알까? 만약 이를 안다면 천부라 할 만하다.
昔者莊周夢為胡蝶,栩栩然胡蝶也。
어느 때인가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거칠 것 없이 날아다니는 나비.
自喻適志與!不知周也。俄然覺,則蘧蘧然周也。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장자 자신임을 알지 못했다. 잠에서 깨어 보니 곧 소스라치게 놀란 자신이었다.
不知周之夢為胡蝶與?胡蝶之夢為周與?周與胡蝶,則必有分矣。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이었던가 나비의 꿈에 장자였던가, 장자와 나비는 곧 분별이 있음이다.
此之謂物化。
이를 일러 물화(세상과 사물의 변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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