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도쿠가와 체제의 위기 - 제 1 장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체제
일본 근대화라는 대격변의 배경에는 2세기 이상(1600년에서 1868년에 이르는 도쿠가와 시대)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유래없는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도쿠가와 지배하의 질서는 사회적 신분의 이동과 사람들의 지리적 이동을 제한하는 엄격한 법제에 의해 지탱되었다.
...동시에 도쿠가와 시대는 지방에서 생산과 상업이 번성하고 도시생활에 활기가 넘치던 시기였다.
19세기 초에 도쿠가와 체제는 몇몇 심각한 문제에 직면...
이런 문제의 단서를 대략적으로 훑어보는 것이 이 체제가 붕괴하면서 일어나게 되는,
예기치 못한 근대화를 향한 다양한 전환에 대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불완전 고용상태의 무사들은 자기 목적의 상실, 즉 정체성의 위기라는 까다로운 문제에 직면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기존의 제도와 사상도 국내외에서 밀려드는 다수의 새로운 압력에 대처하는 데는 부적절하다고 생각되었다.
체제 유지를 도모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지배자들 앞에 사회적 긴장과 幕府打倒運動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40쪽)
1555년 권역을 획득한...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는... 年貢징수기구를 고안해냄으로써, 가신들이 직접 주민들로부터 연공을 징수하는 것을 봉쇄하고,
그 대신 연공 징수를 전문으로하는 관리직을 두어...영주들에게 봉급으로 토지의 지배권을 보증해주는 대신 토지 소유권을 박탈했다...
이 시스템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토지의 질, 생산력, 면적, 소유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가 불가피...
노부나가가 착수한 농지의 질과 면적에 대한 조사와 측량은 근세 정치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42쪽)
노부나가 사후, 부관 중의 하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는 1591년 그의 지배력을 일본 전역으로 넓혔다.
...다이묘들에게 충성의 표시로 인질을 내놓게 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배하는 전역에서 농민으로부터 무기를 몰수...
수십 년에 걸쳐 급속히 전개된 정치체제의 개혁에 대한 움직임은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 곧 군사정권에 의한 지배라는 형태로 귀결되었다.
막부 초대 쇼군이 된 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이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펼친 정책...다이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야쓰의 손자 이에미쓰는 영지를 재분배하고...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라는 제도로 다이묘의 에도 저택에서 쇼군 밑에서 참근하는 것을 의무로 정했던 것이다.
...다이묘는 유소년 때는 모친과 그의 참모들에 의해 양육되어, 성인이 될 때까지 영지에 발을 들여놓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영지와의 일체감도 희박한 편이었다. (49쪽)
도쿠가와家로서는 일왕의 위신을 세워줌과 동시에 일왕을 주의깊게 통제관리하는 일이 도쿠가와가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러한 시책은 쇼군을 사실상 일왕과 거의 대등한 존재로 비치게 했다. (49쪽)
16세기말 일련의 전쟁에는 수백의 다이묘에 의해 수십 만명의 병사가 거의 항시적으로 동원되었다...
이들 무사들은 (봉급에 해당하는) 소규모 토지와 그것을 경작하는 농민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하통일을 향한 일련의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영지에 돌아와 직접 그 관리에 임하려는 무사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태반은 도시의 주민이 되었다...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대부분의 사무라이는 칼을 붓으로 바꿔 들었다...
무사는 전사에서 관료로 탈바꿈했다...봉록의 서열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무사들의 생활상은...대다수는 가난했다.
도쿠가와 시대에 이런 무사 계급에 속한 사람은 인구의 약 6~7%를 차지했다. (51쪽)
1630년대에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모든 서민을 인근 사찰에 등록하도록 제도화했다.
1665년에 쇼군이 서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절에 시주하는 집임을 보증하는 증명서의 발행을 의무화하므로써...
이사와 여행 시에도 이 증명서를 필요로 하게 함으로써...등록 제도는 민중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배하는 수단...그리스도교 금지를 위한 수단...
이렇게 해서 농민신분과 상인 또는 직인이었던 조닌(町人) 신분은 고정되고 세습화되었다. (52쪽)
1633-1639년에 이에마쓰는 일본인과 외국인의 교류를 제한하는 일련의 명령을 내렸다....
1630년대부터 1850년대까지 200년 이상에 걸쳐 일본과 구미의 교류는 크게 제약되었다.
그 기간은 유럽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대였다. 산업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난 시대였고,
신세계의 식민지화가 진행된 시대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 북아메리카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대와 미국이 독립한 후의 첫 70년이 포함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56쪽)
조선사절단은 중국의 궁정을 참대할 때에 요구된 것처럼 엎드려 절하거나 복종의 뜻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도록 요구 받은 적도 없었다.
조선과 일본은 거의 대등한 교류였다...이러한 외교 정책에 의해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의 지배자로서 국내의 입장을 정당화하려 했다...
막부는...조선통신사를 일본 국내의 정치질서가 외국에서도 존경받고 있음을 엘리트 다이묘들과 상층 무사들에게 과시하는데 이용했다.
18세기 말까지 이런 대외관계 시스템은 막부의 관리와 다이묘, 국제 정세에 밝은 다수의 사무라이들, 농촌 주민 중 교양있고 부유한 자들 사이에
서구와의 관계를 끊는 것이 올바른 통치방식이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심어주었다....
그로부터 30년 뒤, 이런 서구관은 자신들의 문명이 보편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서구의 신념-함선의 힘을 뒷배로 가진-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도쿠가와 질서는 무너지게 된다. (59쪽)
제1부 도쿠가와 체제의 위기 - 제 2 장 도쿠가와 시대의 사회경제적 전환
2세기 동안의 경제성장과 사회변화는 신분집단간의 경계를 침식한 동시에 농민과 무사라는 두 주요 신분집단 사이에 새로운 긴장을 야기했다. (61쪽)
전국각지의 도시가 한층 안정된 상태가 된 것은 도쿠가와 정권의 지배가 확고해지고 다이묘들의 연합체제가 전국적인 규모로 안정되고 난 뒤...
17세기 도시와 상업은 유례없이 번성하게 되었다...이런 도시화를 촉진하고 개별 번의 경제를 오사카나 에도와 직결시켰던 최대의 요인은
바로 참근교대제가 시행된 때문이었다. 이 제도가 없었다면, 개별의 번은 횡으로 연결되지 못하고...(62쪽)
참근교대제가 다이묘에게 큰 경제적 부담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간 통상을 확대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의 시장, 특히 에도와 오사카의 시장을 겨냥해서
지역특산품 생산의 특화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었다. (63쪽)
유럽인구의 2%만이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에 살 시기에, 1700년대에 전체적으로 일본인의 5-6%가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에 살고 있었다.
...도시의 성장은 몇 가지 중대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도시주민들에게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그리고 또 수백 명에 달하는 가신을 거느린 다이묘의 행렬이 에도와 번을 오가는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한
교통과 통신의 인프라 체계가 정비되었다. (64쪽)
에도의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현금은 엄청났다.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은 에도의 저택을 꾸려나가야 하고,
에도 근무 가신들의 생계를 위해 연공미를 시장에 운반해 현금화하여 에도에 송금해야했다.
중부 이서의 다이묘들은 환금을 위해서 저장미를 조운하는 발송지로 오사카항을 이용했다....
다이묘들로부터 오사카에서 쌀을 받는 대신에 에도의 지점이 다이묘들에게 판매대금을 지급하는...미곡선물시장이 개설된 것이다. (70쪽)
19세기 초 일본의 식자율은 남성의 경우 1/3에서 절반 정도, 여성의 경우 1/5정도에 달했던 것 같다. (72쪽)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일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과 일본의 식자율(문해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고로 조선의 식자율은 10% 수준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60-70% 이상의 노비와 소작농으로 구성된 조선의 인구구성은
문자가 필요없는 생활이었을 것이고, 식자율을 놓고만 보아도 일본은 상대적으로 계급간 교류가 활달한 사회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의 호황에 이은 150년 동안의 경제사회 상황에 대한 자료를 보면 정체와 활기가 병존했다...
더우기 172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총인구도 정체상태에 빠졌다....(73쪽)
도시가 정체된 이면에는 18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농촌에서 생산과 상거래의 비약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다. (77쪽)
농촌지방의 각지에서...가내공업의 복잡한 생산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 생산네트워크란 10여 단계 이상으로 구성되는 생산공정을 망라하는 것인데,
개별 공정의 전문화된 생산자들을 네트워크화하여 그 전반을 仲買人이 관리하는 것이었다... (77쪽)
...이런 변화는 농촌의 원초적 공업화라 부를 수 있는데, 생산규모의 확대와 원격지 시장을 대상으로 한 전문화된 생산네트워크의 형성이 그 특징이다. (78쪽)
과거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농가의 딸은 교토의 公家에서 식모살이를 했고, 빈농의 딸은 도시나 소도시의 유곽에서 매춘부가 되었다.
그 경우 부모들은 예상되는 임금의 선급으로 상당한 금액을 받았다...
식모살이, 유곽에서의 몸팔이, 공장에서의 고용살이 등, 이 모든 임금노동의 형태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머지않아 근대일본의 사회경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81쪽)
서로 모순되는 정황을 조정하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요인은, 계급간과 계급내에서, 그리고 또 지역간에서 자원의 분배가 불균등했다는 인식이다.
사회계급에 의해서 또 지역에 의해 놓여있는 상황에 편차가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두 번째 요인은 아시아 규모, 나아가서 글로벌 규모의 무역 네트워크에
도쿠가와 경제가 비교적 제한적으로 편입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82쪽)
일본에서는 경제 전체의 성장과 도시의 성장 대신 내부지향적이고 농촌 중심적인 성장이 일어났던 것이다. (83쪽)
제1부 도쿠가와 체제의 위기 - 제 3 장 도쿠가와 후기의 지적 상황
다이묘의 무사들이 만성적인 빚을 지고, 기근이 심각한 황폐화를 초래하고, 격렬한 항의행동이 빈발하는 등
이런저런 형태로 고뇌와 쇠퇴의 징후가 광범위하게 퍼져가는 가운데...
먼저 개혁가들이 부활시키기를 바라던 이상사회에 대해서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않된다. (85쪽)
권위에 필수적인 요소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이해되어 수용되는 정당한 지배라는 관념에 입각하는 것이다....
히데요시도 노부나가의 자기 신격화를 따라했다. (87쪽)
도쿠가와 일족은 위정자의 인격을 상징적으로 신격화함으로써....
첫째, 위계는 자연적인 것이고 옳은 것이다.
둘째, 사리사욕을 버리고 봉사하며, 위계사회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한 미덕이다.
셋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위대한 성인이자 시조이고, 모든 지혜의 근원이다. 이에야스가 만들어낸 질서는 우주의 질서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
이런 이데올로기적 통합을 떠받치고 있던 것은 불교.신도.주자학의 요소를 복잡하게 조합시킨 사상이었다. (88쪽)
유교 교전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주자의 사상은 중세 이래 일본에서는 주로 선종 사원의 승려들이 배우고 있었는데....
유교를 사찰 밖에서 강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에야스 및 이에미쓰의 고문승려들은 승적에 없는 린케(林家)의 사숙에서 유교를 강의하는데 이의를 제기....
일본에서는 학문의 많은 부분이 종교와 관계없는 세속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고,
사숙에서 배우는 학생들의 층은 무사 뿐 아니라 부유한 평민들에게까지 넓어졌다. (90쪽)
** 고급학문?의 독점이 깨어진 대목이다. 사숙을 통하여 소위 하층 무사계급의 자녀들이 교육에 진입하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
일본에서의 유교, 특히 주자학이 사회적 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은 의외이다.
엄밀히는 주자학에 새로이 접근한 교육받은 세력이긴 하겠지만.
유학자들이 발전시킨 종합적인 체계로서의 주자학 사상의 근간은 이(理)였다...
자연법칙과 사회의 법은 동일한 형이상학적 기초에 서 있다는 주장....
(태양을 위에, 땅을 아래에 배치하듯) 위정자를 위에 백성을 아래에 배치했을 뿐이다....
도쿠가와 시대 초기, 신분질서는 구체적인 의미에서도 추상적인 의미에서도...
모든 개혁가들의 최대 목표는 그 신성한 계급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91쪽)
** 주자학이 물리적 세계관을 인간관계와 연결시켰다고 보는 저자의 시각은,
그것이 번역 투에 기인하였든, 혹은 실제적인 서양인의 해석과 사고에서 기인하였든,
나에게는 새로운 시각이었다. 물론 주자학인 현실적인 계급구조를 고착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였다는 비판을 목적으로 기술된 내용이지만.
최종적으로 체제를 뒤흔들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 하나의 긴장은 일왕과 쇼군의 관계를 둘러싼 것이었다.....
(일왕에 의해 쇼군으로 임명되었던 도쿠가와 가의 위정자들...)
도쿠가와 권력 중추의 외부에서 정치적인 활약의 장을 요구하고 있던 자들과
권력 중추의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은
도쿠가와 시대를 통해서 도쿠가와의 권위는 위탁된 잠정적인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사고가 존재하는 한 중대한 위기가 닥쳤을 때, 도쿠가와 위정자들에 대한 신뢰를 잃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자신들 행동의 근거를 일왕에게서 찾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01쪽)
순수한 일본문화를 추구해서,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역사연대기인 <고지키, 古事記>나 장편이야기인 <겐지이야기, 源氏物語>를 비롯한
현존하는 일본의 오래된 문헌을 연구했다...또는 그는 인간에서 신으로 점진적으로 이어져가는 연속체로서 포착한 전통사상으로서 신도를 상찬했다.
그것은 신들을 압도적인 초월자로서가 아니라 인간능력의 한계를 아주 조금 초월한 곳에 위치한,
신비한 영역에 머무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왕은 靈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를 중개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존재였다. (105쪽)
노리나가의 제자인 히라타 아쓰타네는 번에 대한 충성을 초월해서 그 때부터 수십 년 뒤에 서양열강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특징짓게 되는
일종의 내셔널리즘을 확정한 것이다. (105쪽)...
현행 쇼군가의 잠재적 라이벌이었던 분가(分家)의 영지인 미토학파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齊)의 신론(新論)은...
도쿠가와 막부 자체의 강화와 동시에 나라 전체를 강화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 제언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일왕을 더욱더 존경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외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대규모적인 국내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아이자와의 사상은,
잠재적으로 도쿠가와 체제의 안전을 위협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107쪽)
국학과 미토학파가 주장하는 개혁주의, 蘭學을 매개로 하는 서양연구에 강한 관심을 보인 것은,
주로 농촌의 상층부 준엘리트들과 교육을 받은 중하층 무사들이었다. (107쪽)
19세기 초까지 도쿠가와 시대의 많은 사상가나 현상 비판자들의 저작을 관통하는 한 올의 실은,
요컨대 시대는 혼란상태에 있다는 광범위한 인식이었다...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많은 경우 도쿠가와 시대 초기의 이상화된 황금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표면 바로 밑에는, 많은 사람은 일왕을 구심점으로하는, 막부보다 더 큰 존재와 관심이 개혁의 촛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끌리고 있었다. (109쪽)
제1부 도쿠가와 체제의 위기 - 제 4 장 도쿠가와 체제의 전복
1800년 전후로 유럽과 미국의 포경선, 상선, 군함이 불안감을 조성할 정도로 빈번히 일본 해역에 나타나게 되었고,
일본에 가지각색의 요구를 밀어 붙이는....구미 바깥에서도 영향을 확대해 전세계를 변용시키고 있던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두 혁명의 상징이자, 이들 혁명이 내보낸 사절이었다. (111쪽)
1860년대 중반까지 막부는 이미 군비를 확충했고, 쇼군과 번들의 역학관계를 조정했으며, 신기술 수입에 착수했다....
결국 도쿠가와의 위정자들이 구질서에 투입해온 것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들 번은 혁명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하층 무사들의 행동을 지지했다.
새로운 주역들은 스스로를 志士라 부르며, 尊王攘夷의 기치를 내건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112쪽)
외압과 그에 대한 막부의 대응이라는 두 요인은 서로 맞물려서 궁극적으로 막부를 약체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그와 동시에 이 두 요인은 마침 점점 그 수가 늘고 있던 정치운동가들이 품기 시작한 국가의식을 고취시키는 작용도 했다.
...자유무역을 표방하는 서구의 이데올로기는, 강렬한 정의감과, 거부할 수 없는 광범위한 영향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는데,
자유무역의 이데올로기는 분명히 식민화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116쪽)
19세기 초부터 186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불평등 조약의 결과로서) 뻔뻔스러운 야만인들에 대처하는 과정 그 자체를 통해
근대일본의 내셔널리즘이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막부 관료들 사이에서, 각 번의 성 내에서,
또 정치에 관심있는 무사들이 역사와 정치에 대해서 토론하던 私塾에서,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보고, 하나의 통일체로서 방위되고 통치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사고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120쪽)
1860년 막부는 (중국에서 일본 내 매입가격의 3배를 받고 팔던 외국 무역상에 대응하여) 금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금화의 질을 떨어뜨려 금의 국제가격에 맞추었다. 그 결과 통화공급이 늘어나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120쪽)
...폭동 참가자들은 대개 자신을 착취하는 다른 일본인을 공격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그러나 1860년대가 되면서
외국의 무역상, 그리고 더 나아가 애초 무역의 개시에 동의한 일본정부야말로 서민을 괴롭히는 원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21쪽)
이렇게 도쿠가와 막부는 외국의 열강, 반항적인 다이묘, 혈기왕성한 무사들로부터 삼중의 위협에 직면했다....
1867년 11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군대가 교토로 출동해 일왕거를 지배하에 두었다. 1867년 12월 초 반란세력은
1867년 사망한 고메이 일왕의 뒤를 이은 일왕에 막 즉위한 메이지 일왕에게 '왕정복고'를 선언하게 했다.
이에 의해 막부를 廢絶할 것, 막부를 대신해 일왕 밑에 공가와 다이묘의 의한 신정권을 설치할 것,
신정권 내에 도쿠가와가가 설 자리에 없을 것이 선언되었다. (136쪽)
** 여기까지 1부를 읽었다. 맹목적인 국가주의가 어디에서 연원했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고, 규정할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누군가는 체제 유지의 기득권을 유지하려하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체제를 통해 기득권을 확보하려 하는지,
일본의 역사는, 특히 근대 일본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맞닿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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