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다카시 후지타니-화려한 군주 : 만들어진 일왕, 신으로 환치된 종교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18. 3. 4. 22:52

다카시 후지타니-화려한 군주


근대 국민문화의 발명을 대중 내셔널리즘의 형성기와 제국주의의 절정기 안에 자리매김시킨

에릭 홉스봄과 테렌스 레인지의 <전통의 발명>은

이제 국민문화 생산에 관한 그런 시각을 꽤 유명하게 만들었다. (서문에서)


이제껏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이런 전통 (1870년대말 구축된 영국의 왕실, 프랑스 혁명후의 바스티유 기념일, 미국의 국기 의례 등)의 상당수가

사실은 인위적으로 발명되었다는 점을 집중 조명하면서,

일상의 문화를 낳는 역사의 과정-문화를 역사적으로 분석-을 세밀하게 살펴보는 역사화(historicizing)의 방법을 취하여

오늘날 우리가 지극히 상식적인 것으로 여겨 온 관념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국가와 국민적 정체성을 자연적인 것 또한 역사를 초월한 영원 불명의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에 의문을 던지는 일이다. (20쪽, 서론)


발명하기 :

문화적 창작을 가볍게 믿어버리는.....오히려 그 새로운 신조를 날조한 장본인들마저도

자신들이 쳐 놓은 신화의 그물에 깊어 걸려들어.....이 집단신앙현상에 대해

'그것에 의해서 광범위한 계급이 권력을 얻을 수 있었는데'...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23쪽, 체임벌린의 논의를 빌려)

망각하기 :

피에르 부르디외가 '기원의 기억상실 genesis amnesia라고 명명한 증세를 대대적으로 갑자기 겪었음에....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일왕실의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따위의 제안은.....

연속성이라는 신화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보다는 오히려 연속성이라는 원칙 그 자체를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선험으로 간주하는 미셀푸코의

계보학적 방법론에 따라 근대일본에서 일왕제 - 그들의 표현으로 천황제-가 새로운 것으로 등장했던,

그 역사의 균열의 순간을 되돌아보는 방법을 취하고 싶다 (24쪽)


근대 일본인을 특징짓는 강력한 국가의식과 정체성은

일본 열도의 지질학적 형성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연환경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근대 일본의 지배엘리트가 전략적 동기를 가지고 추진한 문화정책에 그 기원을 두고있다. (25쪽)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은.....일본이 외부의 문화적 영향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던 것 이상으로

일본내부의 지역공동체는 서로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강력한 국가적 문화정체성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성리학이라는 공식담론이 "도시환경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점점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왕에 대한 지식은 일반 민중에게는 전무하였고, 국가와는 무관한 기복신앙의 신과 혼동되고 있었다.)

메이지 초기....민속종교의 파괴, 의무교육 도입으로 인한 아이들의 노동마저 빼았기고, 징병의 의무, 이전보다 무거운 세금....

새 정부를 배척한다는 농민들이 정부관리를 "구니 (國)의 배신자, 佛法의 敵'이라 불렀을 때,

'구니'란 결코 '나라'의 의미가 아닌 분명 '지방'을 뜻하는 것이었다. (28쪽)


기억하기 :

국가 공동체 문화로 민중을 흡수하려는 통치자들의 노력은......

일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역설적으로 과거에 전혀 존재하기 않았던) 기억을 구성하는데 기여(의례의 장)했거나,

또는 현재의 국가적 성취와 미래의 가능성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표지로 기능했던 물질적인 의미의 수단

 (물리적 풍경위에 자리잡은 물질적인 기호 - 공공장소의 외관을 계획적으로 변경, 기념동상, 신사의 통폐합, 그러한 결과로서의 에도에서 도쿄로의 변경).....(42쪽)


새로운 메이지 시대의 위정자들은 일반민중들을 단순한 통치대상이 아닌

지식있는 자기 규율적인 주체 (subject) - 요컨대 푸코가 말하는 이중의 의미에서의 주체

- '지배와 예속'에 복종하는 신민(subject)임과 동시에 '양심과 자의식'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주체(subject)로 만들어가고...(44쪽)

국가의 새로운 계몽적 사명.....


일왕의 pageant는 근대 일본의 일왕을 초월적인 주체로 만든 문화적 장치의 일부....시각적 지배를 구축하는 중심요소 (51쪽)

근대 권력의 모델로서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곤 Panopticon 모델의 도식화.....(52쪽)


1868년 에도를 동쪽수도로 제정한 칙령은 국가를 통일하기 위해 일왕의 존재를 두 개의 수도에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때부터 에도는 도쿄로 이름이 바뀌었고, 일왕이 海內一家, 東西同視 (천하를 한 집으로, 동서를 평등하게 돌보는)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칙령이 덧붙인 공식설명에 따르면, 국제적 접촉이 증대하는 시기에 '전국의 힘'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었고,

(거의 갇혀있어왔던) 일왕도 만민의 고충에 귀를 귀울이기 위해 동서를 자주 巡行해야 한다는 것이다. (71쪽)

순행은 정치적 권위가 스스로를 '문화적 틀'에 놓고 자신과 '초월적인 것들과의 관련성'을 확인하는 방법 (80쪽, 클리퍼드 기어츠의 논의를 빌려)

......실제로는 일왕의 순행은 상징적 의미를 둘러싼 사회 일반의 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기호와 의미의 혼돈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81쪽)


국제적 역학관계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에 따라 (프랑스나 영국이 아닌 독일의 군사제도를 도입한 시점과 맞물려)

1883년 왕거(황거라는 일본식 표현)와 왕거 앞의 개방된 관장은 공적 의례의 창조라는 관점에서....

일왕이 군중을 본다는 것은 나라 전체의 신민이 일왕의 상징.통치.응시 아래에서 하나의 공동체임을 스스로 상상하게 만들었고,

달리 말해서 왕거 앞의 광장은 국가를 도식화하는 하나의 공간이었다. (117쪽)

......교토와 도쿄가 표상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메이지 정부가 만들어낸 가공물로 지탱되는 만큼

사실상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교토를 과거로 삼고, 도쿄를 현재와 미래로 삼아 엮어만든 인위적인 이음매가 드러나면

전체 국민적 내러티브가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129쪽)

......일와의 대순행이 종결되는 1880년대 중반이 되면, 특히 도쿄와 교토의 새로운 공간들이

국가 pageant의 장관이 펼쳐지는 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토의 의미와 도쿄의 의미에 상응하는 일련의 상동관계의 구성과 표상을 통해...

의식적이든 무의식 적이든 이 표상의 체계를 아무런 문제없는 체계로 보이게끔 만들려고 애썼다. (130쪽)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강제된, 달리 말해서 역사적으로 개입된 신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문화적인 날조로 신념을 획득할 가능성에 대한 공간을 넓게 열어둔다면, 지배집단이 신념을 工作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비록 항상 의식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국민이 어떤 특정 요소의 작위적인 측면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일련의 대립적인 유비(類比)를 전략적으로 조작해서 말이다. (143쪽, 부르디외의 논의에 기초하여)


메이지 정부 지도자들이 유럽문명에 필적하는 수준으로 근대 군주를 창조하려 애썼던.....


1872년 명치일왕                                                                1873년 명치일왕

(이 시기 조선에서의 연표는 최익현이 대원군을 배척하고 시정폐단을 논하고 1873년,

일본에서는 최초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1872년

프랑스에서는 노동자 정권이 파리코뮌을 수립하였다. 1871년)


이토 히로부미는 왕실가족의 일부일처의 핵가족으로 만들려는.....

왕실 의례를 불교식에서 일본 고래 (그 나마도 조작되거나 창작된) 의 신도식으로,

기억의 문제와 망각의 위협으로부터 청동 기념상을 건립 혹은 국민적 상상력을 위한 야스쿠니 신사,

대대적인 열병식과 관함식 (군함에 대한), (183쪽)

기억의 저장소로서의 기념 우표의 발행과 기념엽서가 등장한다.

(버드나무가 가린 일왕의 자태를 그린) 그림은 권력의 소재를 군중과 수행원들에 의해 드러나지만,

일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게 만들고 (군주의) 응시의 유한성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도록 한다.(182쪽)

....목판화는 일왕의 육신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대신 장막이 드리워진 일왕의 장중한 가마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강력하지만 시각적으로 부재하는 신체의 존재를 시사한다. (215쪽)

(관함식 엽서의 사진에서의) 군주의 존재가 강렬한 함대의 장엄한 광경을 통제하는 효과로서만 감지되는

거의 익명적인 응시로 변화하고 있음을....(184쪽)

푸코의 논의를 빌면 근대성의 생성이 군주제의 쇠퇴와 일치하는 서양과 달리,

일본에서는 권력은 비가시적이고 익명성을 띠어서 소재를 파악할 수 없지만, 권력의 객체는 완벽하게 조명된다.

이것이 '하향하는 개인화'의 체계, 즉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개인일수록 더욱 명확하게 개인화되는 체계이다.

(186, 제레미 밴담의 파놉티콘의 논의를 빌려)


국왕의 두 신체 개념 (정치적 신체와 자연적 신체)을 통해,

서양 국왕의 생명의 끝인

demise (崩 - 재산의 양도 혹은 군주의 정치적 신체가 자연적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다른 자연적 신체로 전해진다는 의미)의 함의를 받아들이고,

단절없는 태양신과 만세일계의 國과 家의 연륜을 기억토록 조작하였다. (204쪽)


메이지 말기, 전국적인 교통망, 통신망이 급격히 발전하지 않았다면, 국가 의례가 행해지는 동안

동시성의 의식이 생겨나기날 불가능했을 것이다. (254)

(인쇄 자본주의와 전체적인 미디어의 발전은 일왕의 pageant를 국민적 동시성으로 광범위하게 경험토록 259쪽)


새로운 국가적 상징들 - 국기, 일왕일가의 초상화, 기미가요, 히노마루 제등 -은 전통적 축제용품이나 음악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이런 상징과 의례 대부분이 새로 만들어진 것임을 망각하고,

이것들을 의심할 바 없는 오랜 전통의 한 부분이라 여기게 될 것이다. (278쪽)


규율적인 정부가 강요하는 새로운 습관 및 신앙과, 민중생활의 오래되고 때로는 무질서하기까지 한 습관과 사고방식 사이의

이 긴장 속에서 다양한 국가 장치 -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와 병영 -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스스로 내면화시키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 의식은 일본 안에 감시의 사회가 창출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왕의 응시에 상응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285쪽)


국가의례는 우리가 누구든 '우리 자신'에게 거의 불변의 특권을 주면서

완전하고 통일된 전체로서 '우리'와 '그들' 사이의 손쉬운 구분을 전제조건으로 한 지식과 신앙을 생산하도록 조장한다.

이런 국가의 pageant는 어떤 국민 공동체가 타국(민)과는 엄격히 구분되는

경계안의 존재라는 관념을 강화할 뿐 아니라

대개는 그 국민 내부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은폐한다. (288쪽)

....방대한 인적.제도적 연결망에 의해 지탱된 근대국가는 기억을 저장하거나 지우는 기계가 되었다.


과거에도 늘 그래온 것인 양, 일왕을 '전통'의 근원이나 국민적 전체성의 상징이라고 본 그런 일왕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산물이었다. (292쪽)

패전 이후, 첫번째 국가의례는 단지 헌법 발포를 중심으로 배치된 것만은 아니다. 그 의례 형식은 메이지 시대의 선례를 거의 답습했다. .

국민이나 연합국이 아니라 일왕 자신이 신헌법을 발포함으로써, 일왕이 사실상 헌법을 초월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297쪽)

패전 후 일왕의 각종 pageant 중에서 부활하나 패전트, 또는 발명된 전통 가운데 소생한 것들은,

미국 정부의 직접적 후원 아래 시작되었고, 일본 보수 정치가들의 목표는 전후 일본 사회에 사회통제를 재건한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298쪽)


나는 시종 궁금하였는데,

한국에서의 기독교와 일본에서의 일왕이 동일한 치환 메카니즘에 의해 생성되었거나, 혹은 유지된다는 

심증을 굳혔다. 아니, 심증의 논리화를 확인하였다는 게 오히려 정확할 것이다.

(기독교와 일왕을 동일시하는 이러한 환원이 불편하다면,

 불교의 경우 조금 더 이른 시점에 신라의 지배하에서의 왕실과의 유사점을 생각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그것은 '근대'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거니와,

'근대적 국가'를 형성하고자 하였던 위로부터의 혁명?을 시도했던 이승만 정권에서나 메이지 유신에서나 유사할 뿐더러,

'형식'을 통하여 '내용 혹은 전근대적 천박한 감성'을 지배.조작하는 사회통제로서의 '의례'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종국에는 이러한 감정호소가 아시아적 특징일지 모르겠다.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유사의제를 상기해 본다면야.

그런 이유로 나는 '근대'가 이 땅에 여전히 도래하지 않았다고 믿는 편이지만.


P/S

요네쿠보 아케미 - 일왕의 하루

어학문소(御學問所 일왕의 집무실)는 나이기(內儀 일왕의 잠자리가 있는 사적인 공간)와 궁전사이에 있느 2층짜리 작은 건물로 앞 뒤 건물과는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학문소는 검소한 분위기였는데, 이 건물이야말로 근대 일본의 중추였다. 나이기에서 '마마'로 불리던 일왕(메이지 일왕-무쓰히토)은

학문소에 들어서면 국가의 '대원수'로 바뀐다. 나이기와 학문소를 연결하는 어두컴컴한 회랑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타임터널과도 같았다. (65쪽)


일왕은 어떤 사람을 측근으로 정했을까? '밖/으로는 근대 일본이 표방한 '적성과 능력에 맞춰서 채용하는' 실리주의를 수용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주변인 '안'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측근으로 선택받기 위해서는

첫째는 정직한 성품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명령에는 '시간에 맞추어' 절대적으로 복종하여야 한다, 라는 것이다. (89쪽)


* 이러한 측근관은 오늘날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그 정직의 목적과 복종의 객체가 '인류'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적인 이익'이거나 '주군?'일 경우가 많다는 점을 차이로 생각한다면.


서류봉투를 뜯어서 와카를 쓰거나 빈 상자를 재활용하는 것을 보면

일왕은 대단한 절약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외에도 연필이 다 닳을 때까지.....(140쪽)

일왕은 물건은 쓸 수 있는 만큼 쓰라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즉, 우리가 검약이 미덕이라는 공통적인 가치관은 일왕의 검약가 모습을 논할 때는 맞지 않다.

그들은 낡은 물건 뿐 아니라 새물건도 쓸 수 있는 만큼 쓰면 되는 것이었다. (142쪽)


* 이러한 논의는 대부분의 독재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재벌에게도.

시바스 리걸과 농주의 하머니를 절묘하게 보여준 저 유신의 그 독재자에게도.

조작되고 만들어진 검약의 측면만을 두고 신처럼 모시는 한국의 전근대가 우울하다.

요컨대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검약의 미덕과 아무런 상관 없는 그냥 조작된 현상의 한 조각 뿐인 것을.


나이기에서는 淸과 次를 엄격하게 구변하여......

일왕의 몸을 씻는 데도 청인 상반신과 차인 하반신을 씻는 시종이 달랐고,

욕조는 물을 허리 정도 까지만 채워서 하반신만 물 속에 담그도록 하였다. (176쪽)


메이지 이후 다이쇼 궁정에서는 항상 일왕의 옆에서 보좌하던 시종직 출사가 사라졌다.

실질적인 일부일처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다이쇼 시대의 나이기는

일왕 부부의 가정집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이기가 일왕의 비가 사는 후궁이기 때문에 필요했던 연락책 업무는 시종이나 내사인으로 바뀌어 담당하게 되었다. (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