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쓰루미 요시유키 - 해삼의 눈 - 역사의 수정은 걸으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18. 2. 28. 21:22

'이렇게 해서 해삼 산업은 피지의 생태 환경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인종적 혼란과 정치적 긴장을 낳았다.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중국인은 홍샤오 하이선 (紅燒海蔘)과 촨쟈푸(全家福) 등에 입맛을 다시고,

해삼요리를 먹지 않는 피지 주민들은 해삼 가공에 땀을 흘렸다.' (90쪽)


저자가 다만 해삼을 하나의 해산물로 쫒아가지 않고,

노동력이 품이 드는 (중국의 쿨리 苦力와 같이) 생산품으로 정리하며,

눈이 없는 해삼의 눈으로 따라가는 산업경제사와 지역사의 흐름은 재미있다.


'포경선의 주요 목적은 고래기름과 연골이었다.....고래기름은 양초나 가정용 램프의 연료로,

연골은 귀부인의 코르셋이나 양산의 뼈대로 쓰였다.'


'고래에게 진정한 적은 작살이나 창을 든 포경선원이 아니라, 유럽이나 북 아메리카의 귀부인과 가정이다'라고 하는 것은,

저 해삼에게도, 아니 해삼이 산출되는 지역민의 삶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해삼 산업과 더불어 피지 섬에서는 민족과 환경의 혼란이 일어났지만,

아마 중국인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해삼요리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을 것이다.' (97쪽)


'다만 대상이 고래로 바뀌었을 뿐 오늘날 상품이 생산되는 곳과 소비되는 곳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호주 최초의 근대산업, 혹은 수출 산업이 서양을 위한 고래인지, 중국/동양을 위한 해삼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한 듯 하다.

여기서 근대라고 함은 상품의 생산에 노동과 보수의 개념이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해삼을 빌려 인류, 인간족의 발걸음을 그려내려고 하는 것은 국가사관에 이의신청을 하기 위함이다.' (104쪽)


'해삼이 도감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서에 해삼잡이 어민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란 지식인이 지배자의 종이되어 쓰는 것이기 때문에, 학문은 곧잘 이러한 것을 간과한다.

사실 간과된 해삼만큼 계급상승이 가팔랐던 식품은 없었다.' (512쪽)


'게다가 해삼의 산지는 서양열강의 이익을 올린 식민지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해변이다.

이 사실은 식민지 주의 역사에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식민지는 그 본국과의 시장관계 속에서만 살아온 것은 아니다......

식민지 주의의 지배와 규정은 실제로는 완결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해삼은 식민지주의 만능의 사고를 해독하기에 매우 적합한 주제이다.

해삼을 따라 남태평양의 섬들을 돌아다녀 보면, 국경이라는 제도가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를 통감하게 된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는 아직도 완성에 이르지 못한, 길 위의 존재다.

역사의 수정은 걸으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않되는 듯 하다.' (513쪽)


'소비자의 눈은 언제나 생산자에게까지 이르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소비자의 계급이 높아질수록 그리고 시장경제의 규모가 커질수록,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거리는 멀어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해삼의  눈을 빌려 인류의 생활과 역사를 생각해 보았'다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