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데이비드 하비 (1) - 창조적 파괴의 결정적 순간과 역사지리적 사회진보의 물질성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19. 8. 12. 18:28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데이비드 하비, 김병화 옮김 글항아리


서문, 단절로서의 근대성


근대성modernity의 신화 가운데 하나는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이라는 개념이다....

...근본적인 단절이라는 것이...상이한 분야(문학, 예술, 도시계획 등)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표현하는 스타일의 문제인지,

                                         아니면 근대성의 집합적인 힘이 나머지 세계를 집어삼기는 방향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는하는...시간과 장소에

                                                    그런 분야들의 변동이 집결되는 것을 가리키는 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근대성의 신화는 후자의 해석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5쪽)


이에 비해 그 대안인 근대화이론 (근대성이 아니라)은 생시몽이 처음 만들었고 마르크스가 적극지지한 것으로,

어떤 사회질서도 기존도 기존 여건 속에 이미 잠복해 있지 않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근대 사상의 펜테온 안에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는 두 사상가가 근본적 단절의 가능성을 이렇게 명백히 부정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혁명적 변화의 중요성을 주장했다는...

의견이 수렴하는 곳은 "창조적 파괴"라는 구심점 부근이다....

새로운 사회형태를 만들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옛것을 능가하거나 그것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근대성이 하나의 개념으로 의미를 지닌다면, 그것이 창조적 파괴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신호해주기 때문이다.  (6쪽)


우리는 (오스만이 루이 나폴레옹으로부터 네가지 색깔이 표시된 파리의 도로 시스템 재구축 계획도를 받았다는 ) 이 이야기가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18쪽)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 Eugene Haussmann은 (1853년까지 정기적으로 모여 매우 자세하고 정교한 계획서를 작성한 도시 쇄신파의 ) 그 계획서를 고의로 무시했다.

오스만은 (1853년까지 정기적으로 모여 매우 자세하고 정교한 계획서를 작성한 도시 쇄신파의 ) 그 계획서를 고의로 무시했다.

게다가 오스만은 대체로 황제가 원한 것보다 더 많이 하거나 혹은 더 적게 했다.

황제는 도시에 있는 기존의 내용적 구조를 무시하지 말고 또한 직선을 피하라고 지시했다. 오스만은 이 두가지 사항에 모두에 있어 황제를 무시했다.

황제는 상수도 보급이나 교외 병합 문제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오스만은 두 가지 모두에 큰 흥미를 보였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20쪽)

....오스만의 그런 부정에는...근본적인 단절이라는 신화,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 신화로 자신과 황제를 포장할 필요...

한편으로는 건국신화를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이 베푸는 자비로운 전제주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판단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22쪽)


보들레르가 느낀 근대성이라는 개념에는 모순이 있다. ...

(1848년 튀일리 궁의 약탈과 바리케이트에서 벌어진 창조적 파괴의 경험으로부터) 1860년에 이렇게 썼다.

에술가의 목표는 "영원하고 확보 부종한 것"을 다루는 예술의 다른 절반과 관련하여

근대를 상대적으로 "일시적으로 덧없고 우연한 것"으로 이해하는것이이어야 한다.

플로베르의 딜레마와도 공명하는 어떤 문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충분히 빠르게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 종합이 도출되고 그것을 손에 넣기도 전에 우리를 끌고가던 유령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렵다.

그러나 온통 이렇게 서두르는 바람에 엄청난 양의 인간 잔해가 뒤에 남겨진다.

"뿌리 뽑힌 무수한 인생"을 무시할 수는 없다. (32쪽)


모두가 1848년 이후에야 그처럼 거창하게 본연의 모습을 찾아냈다는 사실은 근본적인 단절로서의 근대성이라는 신화에 힘을 보태주며,

다양한 상황에서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사고와 실천의 변화에 뭔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그 시기의 경험이었음을 시사한다.

나는 우리가 제기해야할 주된 질문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1848년 이후에 달성된급격한 변형은 그 이전 시기의 사고와 실천에서 어느 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예시되어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36쪽)


혁명 운동이 기존 질서 안에 잠복해 있는 긴장을 먹이로 삼는 것이라면....(36쪽)

(도미에가) 배아 상태에 있는 변화의 과정을 예고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가시화하는...(37쪽)


산만한 이론들을 끊임없이 해체하는 지점에서 멈춰설 수는 없으며,

사회생활의 형성에서 담론과 인식 및 역사적 지리학적 연구가 지니는 힘과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진보의 물질성을 계속탐구해나가야 한다. ....

역사적 지리학적 물질주의의 방법론이 특정한 시공간에서의 도시 변화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