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국 하면 저는 우선 낡은 완행으로 떠나는 열차여행이 떠오릅니다. 그 열차에는 '비둘기'라는 더없이 예쁜 이름이 붙어있어 더욱 서러운 덜컹거림이 있습니다. 용산 역에서 출발하는 이 열차를 타고 고향까지 가는 길은 물경 12시간이 걸리는 탓에 우리는 흔히 그 열차를 12열차라 부르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단번에 가는 것이라면 그 서러운 덜컹거림은 오히려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만, 우리들이 새벽잠을 참아가며 버텨야 하는 것은 삼량진-그 동네가 포구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에서의 갈아타는 시간은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대구에서 출발하여 삼량진을 거쳐 진주로 가는 다른 비둘기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고향길 새벽녘 갈아타는 시간까지 약 50여분의 여유와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우리는 역사 바깥으로 나가 해장국 한 그릇을 앞에 두고 겨울 칼 바람을 피하거나 새벽 허기를 때웁니다.
노량진 시장의 새벽 해장국이거나 청량리 뒷 골목 돼지 순대나 오소리감투, 애기집과 같이 먹는 퉁퉁한 감자탕 역시 일미이지만 맛보다야 역시 그리운 사람과의 새벽 해장국은 그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애틋한 그리움이 샘솟게 합니다.
우리가 만날 시 '청진동 해장국 집에서'가 그 목마른 그리움의 서정입니다.
청진동 연가
청진동 해장국 집에서 나는 알았다
밤도 늦어 1시 30분
삼삼오오 팔을 걸고 지나가는 연인들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내게도 사랑이 있었던가
꽃잎처럼 아름다운 향기가 있었던가
해장국 후후 불어 넘기며
고개 돌려 나는 기억해 냈다
밧줄을 타듯
끌려가고 끌려오고
한 시절 붉게 물들이던
나의 아내들
별 하나 훌쩍 전깃줄을 뛰어넘는
청진동 해장국집의 밤
휴지로 코끝을 문질러가며
여인 하나 별 따라 사라지는
어두운 이승
나는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리창밖엔
한 사내가 전화기에 매달려 휘청이고
텔레비전에선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집에 가자 술국도 재촉하는 시간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나는 알았다
나의 아내들 아직도 창 밖을 오가고
내 얼굴도 거기 함께 묻혀서 가고
밤은 깊어오는데
저 불빛이 두려운 것을
박철시집, 『새의 전부』 중에서
<문학동네, 1995>
별 하나 훌쩍 전깃줄을 뛰어넘는 시간의 해장국집, 저 불빛이 두려운 사내의 마음을 우리는 수이 알기 힘들거니와 전화기에 매달려 휘청이는 사내들은 더러 보아온 터수에 그 마을 청진동은 어디에 있든 우리들 가까이 있는 마을에 다름 아닙니다.
이제는 술자리도 흔지 않은 시절이건마는 여전히 남포불빛 새어나오는 술청이 그리운 건 그 시절의 향수만이 아닐 겁니다. 숟가락 자국 똑똑하고 젓가락 장단이 함께 박자를 맞추던 그 해장국 집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났고, 앞으로도 그리될 것입니다.
그리운 이들과의 만남이 있었고, 또 예약되어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시, [청진동 연가]가 연출하는 공간입니다.
문학이란 그 그리운 공간을 배회하는 솔 바람 같은 것, 바람따라 묻어나는 손때 반질반질한 윤기같은 것인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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