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의 기록

박철 시인의 청진동 해장국집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02. 9. 14. 01:24

 

해장국 하면 저는 우선 낡은 완행으로 떠나는 열차여행이 떠오릅니다. 그 열차에는 '비둘기'라는 더없이 예쁜 이름이 붙어있어 더욱 서러운 덜컹거림이 있습니다. 용산 역에서 출발하는 이 열차를 타고 고향까지 가는 길은 물경 12시간이 걸리는 탓에 우리는 흔히 그 열차를 12열차라 부르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단번에 가는 것이라면 그 서러운 덜컹거림은 오히려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만, 우리들이 새벽잠을 참아가며 버텨야 하는 것은 삼량진-그 동네가 포구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에서의 갈아타는 시간은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대구에서 출발하여 삼량진을 거쳐 진주로 가는 다른 비둘기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고향길 새벽녘 갈아타는 시간까지 약 50여분의 여유와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우리는 역사 바깥으로 나가 해장국 한 그릇을 앞에 두고 겨울 칼 바람을 피하거나 새벽 허기를 때웁니다.

 

노량진 시장의 새벽 해장국이거나 청량리 뒷 골목 돼지 순대나 오소리감투, 애기집과 같이 먹는 퉁퉁한 감자탕 역시 일미이지만 맛보다야 역시 그리운 사람과의 새벽 해장국은 그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애틋한 그리움이 샘솟게 합니다.

 

우리가 만날 시 '청진동 해장국 집에서'가 그 목마른 그리움의 서정입니다.

 

 

 

청진동 연가

청진동 해장국 집에서 나는 알았다

밤도 늦어 1 30

삼삼오오 팔을 걸고 지나가는 연인들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내게도 사랑이 있었던가

꽃잎처럼 아름다운 향기가 있었던가

해장국 후후 불어 넘기며

고개 돌려 나는 기억해 냈다

밧줄을 타듯

끌려가고 끌려오고

한 시절 붉게 물들이던

나의 아내들

별 하나 훌쩍 전깃줄을 뛰어넘는

청진동 해장국집의 밤

휴지로 코끝을 문질러가며

여인 하나 별 따라 사라지는

어두운 이승

나는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리창밖엔

한 사내가 전화기에 매달려 휘청이고

텔레비전에선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집에 가자 술국도 재촉하는 시간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나는 알았다

나의 아내들 아직도 창 밖을 오가고

내 얼굴도 거기 함께 묻혀서 가고

밤은 깊어오는데

저 불빛이 두려운 것을

 

박철시집, 『새의 전부』 중에서

 

<문학동네, 1995>

 

 

별 하나 훌쩍 전깃줄을 뛰어넘는 시간의 해장국집, 저 불빛이 두려운 사내의 마음을 우리는 수이 알기 힘들거니와 전화기에 매달려 휘청이는 사내들은 더러 보아온 터수에 그 마을 청진동은 어디에 있든 우리들 가까이 있는 마을에 다름 아닙니다.

 

이제는 술자리도 흔지 않은 시절이건마는 여전히 남포불빛 새어나오는 술청이 그리운 건 그 시절의 향수만이 아닐 겁니다. 숟가락 자국 똑똑하고 젓가락 장단이 함께 박자를 맞추던 그 해장국 집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났고, 앞으로도 그리될 것입니다.

 

그리운 이들과의 만남이 있었고, 또 예약되어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시, [청진동 연가]가 연출하는 공간입니다.

 

문학이란 그 그리운 공간을 배회하는 솔 바람 같은 것, 바람따라 묻어나는 손때 반질반질한 윤기같은 것인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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