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의 기록

강형철 시인의 봉천동에서, 그 마을 봉천동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02. 8. 17. 01:20

세상이 변했지요.

 변혁을 이야기하던 이들은 산으로 숨어들고, 체 게바라가 책 표지의 이미지로 팔리는 시절입니다.

블로그가 출판을 대체하는 이즈음에, 세상 모든 것들이 이미지에 한 끝을 대고 있고,

나의 이러한 작업 역시 이런 혐의에서 멀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오랜 동안 살았던 동네, 봉천동에 대한 시 한 편을 두고 이러한 상념에 쌓이는 것은 무엇인가 빚을 진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봉천동에서

 

하늘 끝 동네

목련은 아득하였지요

가끔 웃기만 하던 그대는

목련꽃 뜯어

하늘가에 함부로 던져두고,

글쎄요

언제 우린 하늘에 닿을까요

 

?야트막한 사랑?

강형철 시집

<푸른숲, 1993>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몇 분을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80년대의 새벽 ?노동의 새벽?<풀빛, 1984>이란 시집으로 노동의 새벽 뿐 아니라 문학에서 그것 이상을 헤쳐내신 박노해 시인,

?만국의 노동자여?<청사, 1988>란 시집으로 노동 문학의 한 둔덕을 이루신 백무산 시인······

이들 선배 노동자 시인들이 원고지 위에서 흘린 핏방울이 없었다면 어찌 노동문학이라 이름지어 부를 그 무엇 깃발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이 변하였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세상을 보는 시각 하나가 이러저러하게 부정당하였을 뿐

세상이 그 부정을 강요한 또 하나의 생각만큼이나 진정코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변한 것은 아무 것도, 또 아무데도 없는 탓에 우리는 여전히 ‘문학, 그 목 매달아도 좋을 나무’에 기대어 여전히 새벽을 맞습니다.

대학(大學)에서는 이르기를 생지자중(生之者衆)하고 식지자과(食之者寡)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위지자질(爲之者疾) 하고 용지자서(用之者舒) 해야 한다고 이르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 달라진 게 없는 모양입니다. 

- 만드는 자가 많고 먹는 자는 적어야 한다. 만드는 일을 하는 자는 빨라야 하고, 그것을 쓰는 자는 느긋해야 한다-

 

맨발로 추운 광야를 지나온 선배 시인의도움으로 우리는 이제 ‘지도비평’ 등의 수사를 떼고

조용한 저녁 책상 앞에서 앉아 시를 대할 수 있는 시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대, 조국이란 말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는가”고 절규한 저 ‘부미방’의 문부식 시인이 ‘어디에 핀들 꽃이 아니랴’고 마음 길을 재촉합니다.

우리가 찾아갈 첫 마을은 봉천동입니다. 하늘 낮은 곳, 봉천동. 팍팍한 일상에 지친 고단한 노동의 육신을 누이는 곳, 그곳.

 

시를 읽다보면 생각느니······

글쎄요, 언제 정말 우리는 하늘에 닿겠습니까?

목련을 하늘 가에 함부로 던져 놓은 그대는 누구라도 좋고, 또 누구가 아니라도 좋을 터이지만, 그 하늘만은 분명하고, 명징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 눈물 많고 선한 웃음 짓던 그 사람, 그네들이 사는 동네에는 ‘첫신을 신은 아이의 발자국이 계단 위에 찍’히고

그 발자국 찍힌 자리에서 ‘촌스럽게 생긴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있’는 층층의 시멘트 계단, 그 계단 끝의 하늘가처럼 말입니다. (같은 시집, ‘하늘꽃’)

저녁 무렵, 저는 가끔씩 봉천동 고갯길을 넘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보게 되지요. 낮게 옹송그린 지붕 밑, 서로 부대끼면서 저녁밥 짓는 내음 솔솔 풍기는 그 마을, 사람들은 점점 높이 산으로 올라가고,

그 탓에  하늘은 더없이 낮아진 마을, 그리하여 어느새 하늘이 바로 눈 앞에 있지만 결코 그 하늘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삶이 응어리진 곳, 봉천동······.

 

그 마을 봉천동에서 시인의 시는 밝게 빛나는 저녁 등불 같은 것입니다.

시가 있어 빛나는 동네가 아니라 마을이 있어 빛나는 시, 이것이 여러분께 소개한 시 ‘봉천동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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