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현재 방글라데시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불 수준이다.
한국이 1977년에 1000불을 넘겼으니 물가 상승 등을 감안한다면 1977년의 한국과 비교하는 것은
그리 동떨어진 비교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경우 2000불은 1983년에야 겨우 넘긴다.
이런 숫자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장기집권한 독재자 박정희나
'정의사회구현'을 주창했던 전두환 따위가 한국경제를 일으켜세웠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중위연령만 놓고 보자면 방글라데시가 2020년 27.6세 한국은 1990년도에 27세를 찍었다.
현재 한국의 중위연령은 약 44세에 육박한다. 그만큼 늙었거나 혹은 건강에 대한 이기심이 넘치는 사회라는 뜻일 게다.)
1977년을 되짚어보면 (나의 경우 중학교 1학년이었다.) 당시의 한국에 핸드폰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인터넷도 그러하고
더욱이 물을 '사서 먹는다'라는 것은 개념조차 등장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뉘집 대문을 밀고 들어가 물 한 그릇 얻어 먹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요컨대 인간의 자본적 욕망과 소비가 제한되어 있었거'니와
어떤 종류의 소비에 대해서는 개념은 차치하고 발상의 단초 조차 생각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하기사 세수대야와 발씻는 대야가 따로 있기는 했다.)
그러나 한국의 당시와 비슷해보이는 방글라데시에서는 2대의 핸드폰을 쓰는 이들이 많고,
(그러나 실제적으로 고정적으로 데이타를 사용하거나 인터넷 망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알려져있다.)
인터넷 공급업체는 (독점이 없는 탓인지) 400여개 업체라고 듣고 있다.
(공업 폐수인 비소 수은의 지하수 오염으로 물이 좋지 않은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여하튼 페트 병에 담긴 생수를 마시고 생수병 플라스틱 쓰레기를 배출한다.
소득이나 생활 기반을 넘어선 현대적 소비는 자신들도 모르게 침투하였거니와
그 소비를 뒷받침할, 이를테면 쓰레기를 배출하는, 시스템은 부재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역시 빈 소주병을 참기름 병으로 썼었던 날이 있듯이,
이 페트병을 무언가 사용하는 이들이 있긴하지만, 단순히 페트병을 난방용으로 태운다는 의심은 지우지 못하겠다.
그래도 가난한 이들이 모든 것들을 주워가기에 생각만큼의 쓰레기는 보이지 않는 편이다.
다행이라면 누군가에게 쓰레기처럼 보이는 것들도 자원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그들의 가난과 불평등이고,
불행이라면 그렇게 주워갈 수 밖에 없는 삶이 얼마간은 더 지속될 거란 점이다.)
비극은 - 지나가는 이의 눈으로 보기에 - 이러한 간극에서 발생한다.
외래로부터 들어온 자본주의적 소비현상에 대응하여 이를 뒷받침하거나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기술적 개념/철학은 빈곤한 터여서
일차적이고 소비지향적인 근대적 삶으로인 인한 문제점은 생활의 곳곳에서 보여진다.
자연이나 토지가 부양하거나 해소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소비지향주의는
더하여 높은 인구밀도로 인하여 이를 해결할 간단한 방법이란 상상하기 어려워 보인다.
시대의 한계로 인해 제한된 소비로 생존의 최소한을 유지하던 한국의 당시와
삶의 편의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상으로 침투해 근대적 소비를 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방글라데시는
후발 근대화 국가로서 당시의 한국과는 다른 상황과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보여진다.
즉, 한국의 70년대에서는 내부적으로 해소되었던 문제들이
여기서는 비가역적인 손실이나 미래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느낌이다.
시스템이나 소프트웨어, 그리고 이를 기반하는 철학이 따라붙지 못하는 기술은 재앙이다.
환경 문제가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국민소득 2000불에서 환경문제는
생존의 문제, 최저임금의 문제, 소득의 불평등과 부패의 문제들과 비교한다면 이미 눈밖의 것일 터이다.
(우리 역시 일본의 공해 산업을 중화학 공업과 국제 분업의 구조 아래에서 받아들인 적이 있질 않은가?
당시를 기억케 할 울산 공업탑의 치사문은 시사적이다.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 박정희는 그 이듬해인 1962년의 치사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제2차 산업 第2次産業의 우렁찬 건설 建設의 수레소리가 동해 東海를 진동 震動하고
공업생산 工業生産의 검은 연기 煙氣가 대기 大氣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민족 國家民族의 희망 希望과 발전 發展이 눈앞에 도래 到來하였음을 알수있는것입니다' )
토지가 부양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넘어서는 높은 인구밀도의 국가에 있어 해법이 쉬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민초들의 삶을 얼마나 더 갈아넣어야 세상이 달라질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는 삶은 가볍고도 처절한 것이어서,
갈리는 줄을 모르고 갈려나가는 시간의 질곡과 무게에 삶은 늘 짓눌리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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