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부르주아 전, 피터 게이 지음, 고유령 옮김 - 빅토리아인이 따르고자 했던 모습은 가족과 사회, 국가라는 주어진, 그러나 기꺼이 납득할 수 있는 틀 내부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자유로운 개인의 그것이었다.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5. 5. 4. 14:57

부르주아 전, 피터 게이 지음, 고유령 옮김, 서해문집

 

슈니츨러는 19세기 사람이지만 그 생애의 상당 부분은 20세기에도 걸쳐 있다. 20세기가 19세기로부터 태동했기 때문에, 19세기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서론 11쪽)... 제1차 세계대전이 두 세기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을 만들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정치 영역에서 옳다고 간주되는 사실이-이 전쟁의 결과로 20년 후에는 유례없는 대중동원과 대량 살인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었다-고급문화의 영역에도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20세기와 결부된 예술.문학.사상의 움직이은 모두 1914년 이전에 싹터서 각 분야에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혁명적 사상가는 빅토리아 시대의 선조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가를 증명하는 더할 나위 없는 사례다. (서론, 12쪽) 

 

계층 간의 미세한 차이를 올바르게 파악하려면 단순히 '귀족, 부르주아지, 평면, 서민'으로 구분하는 것보다는 더 세밀하게 나누어진 "일련의 하위 범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양 어느 나라에서나 중간층 내부의 아주 사소한 차이가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족벌주의, 질투, 뒷공론, 그리고 수많은 부르주아지가 따랐던 결혼전략을 빚어냈던 것이다. 19세기 부르주아지를 이해하려는 역사가는 스스로를 '중간계급으로 정의했던 사람들 사이에 만연했던 갈등은 물론 이들을 동질적인 집단으로 만들었던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27쪽)

 

19세기 부르주아지를 구별하는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을 지배하는 권위에 대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습관화된 태도다. (32쪽) 다른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바로 이 점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지는.... 권력자가 견제를 받지 않을수록, 그리고 피지배자인 중간계급이 비굴할수록... 두 가지 극단적인 유형, 즉 활기찬 중간계급과 소심한 중간계급이 병존했으며...

  멘체스터와 뭔헨이라는 19세기의 두 두시를 비교해 보면 모험적 부르주아지와 순종적 부르주아지 사이의 외적 경계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33쪽)...

... 버밍엄은 문학과 미술 분야의 많은 점에서 멘체스터의 쌍둥이였다.... 곧 민주적 문화창조의 주목할 만한 사례... 버밍엄 시민들은 당연히 넘치는 자부심으로 미술관 입구의 넓은 홀에 감동적인 글을 새겼다. "우리는 공업의 수익으로 예술을 진흥시킨다." 이 글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것은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한 뮌헨 시 관리들이 구미술관의 머릿돌 동판에 새긴 비굴하지만 사실 그대로의 설명이다. "바이에른은 이 건물과 그 예술적 보물들을 통치자인 비텔스바흐 가의 고귀한 증여에 빚지고 있다." 이 두 개의 비문은 빅토리아 시대 부르주아의 (35쪽) 독립성과 의존성의 병존을 증명한다. (36쪽) 

 

... 그러나 19세기 영국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부르주아의 수중에 있지 않았다. 1859년 존 스튜어트 밀은 유명한 자유론(on Liberty)에서 "주로 중간계급"이 지배계급이 되었다고 밝혔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보다 10여 년 전에 (46쪽) 영국의 "지배계급은 모든 다른 문명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반세기 지나 생의 마지막 무렵에 그는 이 선언이 타당성 없는 일반화에 불과했다고 고백하면서 "부유한 중간계급의 굴종"을 의아하게 여겼다. 그는 "토지귀족이 거의 모든 정부 요직을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두 번째 견해는 첫 번째 견해보다 정확했다. 그렇지만 중간계급은 서서히 그들의 자리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47쪽)

 

빅토리아 시대 중간계급의 외형은 아래쪽은 매우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피라미드 형태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50쪽)... 피라미드형은 그것을 신축성 있는 구조로 간주하는 한 유용하다. 시간이 흘러 부르주아 중간층과 상층은 그 수와 부, 정치적 중요성을 함께 증대시켜 나갔던 반면 부르주아 하층은 숫자만 늘었다. (51쪽)

... 부르주아 피라미드의... 눈부신 팽창으로 인해 당대인들은 그 하층집단에 독자적인 명칭을 부여했으니... 이들 '신흥계층'의 존재는 빅토리아 사회가 동요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들이 생각한 사치는 레스토랑에서의 만찬, 음악회의 참석, 휴가여행, 새 외투, 안락한 가구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벽에 붙인 그림들은 종교화 외에는 잡지에서 오려낸 것들이었다. 그들은 자녀들을 법률이 허락하는 한 가장 어린 나이에 작업장으로 내보냈으며, 때로는 가족의 생계를 위한 수입증대를 방해하는 노동보호법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들 중 다수는 프롤레타리아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녀들에게 부르주아지의 형식적 예의범절이나 윤리 기준을 집요하게 가르쳤다. 그들은 어쩌면 봉급을 받은 다음날에야 외출이 가능했고 상층부르주아라면 경멸할 집안청소를 직접 했을지도 모르지만,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었다! 

  자의식보다는 공포심에서 나온 이러한 격렬한 거부감은...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음을 시사한다. (52쪽)... 보통 부르주아의 특징은 대체로 중간계급의 일원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말에 대한 금지라고들 한다. 그러나 만일 부르주아의 모토가 자기부정이라면, 이는 그들의 열정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길들여졌지-프로이트의 표현으로는 "다듬어졌기"-때문이다.... 또 다른 부정적 요소가 19세기 부르주아로 하여금 공동의 정체성을 갖(53쪽)게 했다. 

 

부르주아는 주변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편리한 방법을 찾아냈다. ... 그들은 선거권에 대한 재산자격을 부여함으로써 정치적 대중의 규모를 제한할 숭 있었다. 그들은 특권을 가진 부유한 이웃들과 모여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자녀들을 빈민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자기들만의 학교에 보냄으로써 분명히 선을 그을 수 있었다. 그들은 도시에서 가장 끔찍한 구획을 우회하는 길로 출근할 수 있었다. 또 그들은 의복이나 음식, 억양, 취향을 동원해서 자신을 "열등한" 사람들과 구별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수단을 통해 그들은 프로이트가 마르타 베르나이스에게 한 말을 입증했다. "우리와는 판이한 평범한 사람들의 심리가 있다오." (54쪽)

 

...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지를 누구보다도 혐오했던 인물은 아마도 귀스타브 플로베르이리라.... 그는 사랑하는 조르주 상드에게 이렇게 썼다. "격언: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는 모든 미덕의 시작이다." (56쪽)

 

부르주아 애호가들은 ... 1826년 벤담의 친구이며 공리주의 이론가였던 제임스 밀은 "이 나라의 중간계급들의-복수임을 주목하라-가치관, 이들의 점증하는 숫자와 중요성은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있다. 이 계급들은 보다 높은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영국의 자부심으로 불려 왔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시간은 부르주아에게 애정을 품지 않았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조차 열렬한 비판의 와중에도 얼마간 조롱 어린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명한 <공산당선언>에서 그들은 "부르주아는 백 년이 채 못(58쪽)되는 기간 동안 이전의 모든 세대를 합친 것보다도 더 엄청한 생산력을 창출했다"라고 기술했다. 누가 뭐래도 도시민이었던 그들은 "부르주아지는 국가를 도시의 지배에 종속시켰다. 이들은 대도시를 건설하고 농촌에 비해 도시인구를 크게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인구의 대부분을 어리석은 농촌생활에서 구원했다"라고 칭송했다. 이처럼 19세기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들조차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공헌을 인정했다면, 부르주아의 평판에는 아직 희망의 여지가 있었다. (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