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의 기록/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 1 영혼을 울리는 종소리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18. 6. 18. 00:37
우리나라 사람들이 징하게도 많이들 걷고 있었다.
어떤 숙소를 들어가든, 한국사람 십여명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나같은 불교 신자도 오지 않았나, 이곳에.

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한국인이 왜 이렇게많이 산티아고에 오는가, 였다. 
 
나의 대답은, 영어로 올곧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인들 특유의 문화적 쏠림의 따라쟁이 문화와,
약간의 혹은 지나친 과시 혹은 우월감-그것은 거만함의 완곡한 표현이다-을 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답변해주었다. 

등산 이외에는 국가에 어떠한 기여도 없는 한국의 중장년 문화가 한 몫 했을지도. 
(그러나 이것은 청년들이 걷는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대학생이거나 혹은 일시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온 친구들......
의외로 젊은이들이 많은 이 길에서  나는 한 국가의 절망을 본다.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대해 나는 쉽사리 동의하지 못한다.
꽉막힌 한국 현실에 대한 일종의 위안을 얻고자 함이 아니던가.
모든 위안은 삶의 행동을 수반하지 않을 때는 도피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가 언제 영혼의 안식을 얘기했던 적이 있던가?  
우리가 언제 타인의 삶에 빛을 나누고자 했던 적이 있었던가?
동네마다 있는 예배당과 시간에 맞추어 울리는 종탑의 아름다움처럼
단지 풍경이 아니라 종교적 심성의 생활로 누군가에게 친구이거나 이웃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이 순간에 나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의 첫 조항을 떠올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른 순간적인 위안이 아니라 "삶 전체가".
이제 3조항에서 말한다.
"회개는 육신의 다양한 외적 수행을 수반하지 않는 한, 무가치한 것이다."
단순한 "고백과 속죄"가 아니라 "외적인 수행"이 필요함을.

성찰과 영혼의 안식을 생각한다면 불교의 가르침과 루터의 그것이 다르지 않음을 알 것이다.

나의 질문은 "나는 왜 여기 왔는가?", 였다. 그것을 알기 위해 걸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