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사소한 것에 더 쉽게 분노하는가?
농경사회를 지나 산업사회를 거쳐 금융자본주의와 문화자본주의 시대를-한 사회가 늙어가는 순서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산업사회의 초기에 머물러 있다, 면 다행이다. 차라리 노예제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다고 밖에.
특히나 범죄의 인식에서 그렇다. "범죄"란 "공정"의 반의어이다. 여기서는.
농경사회는 하늘에 기대어 자연과 가축 혹은 짐승을 착취하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착취는 상대적으로 덜한 시절이어서 범죄의 징계는 하늘이 벌하거나
자연을 공유 혹은 착취하던 집단 내부의 린치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농경사회의 금융범죄라면 계주의 야반도주 같은 것 정도였을 것이다.
계주라는 것은 별다른 투자(투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 투입을 1/(n+1)만큼 받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집단 린치를 통해 사적 징계가 가능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소위 양반의 범죄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거나 혹은 이를 통한 억업의 기제이다.
농경시대의 단어인 멍에와 재갈(혹은 소머거리 같은)이 여전히 또 지금도 유효한 표현인 데는 이런 이유일 것이다.
자신이 귀속한 계급이 아닌 귀족이나 관료계급의 범죄는 둔감해진다. 외면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하늘에 기대던 모습은 제도화된 종교로 환치되고,
자연과 가축에 대한 착취는 기계의 작동을 위한 인간에 대한 착취로 옮겨간다.
농경시대의 토지귀족과 관료귀족의 산업귀족으로의 성장에 따른,
이른바 소수에 의한 다수 인간에의 착취, 특히 노동 (노동력과 노동시간) 착취에 기반한 사회로 진화?한다.
역시나 노예의식에 따른 둔감함이거나 무의식적 회피가 작동할 것이다. 자신 계급이 아닌 토지귀족이나 관료귀족에 대한 것들은.
착취에 대해 한 마디 거들자면,
조금 더는, 망, 네트워크 사업자에게서는
발전된 형태, 곧, 불특정 다수에 대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착취를 통해 부를 형성한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란 측면에서 보면, 둔감해지거나 일상으로 느껴질 것이다.
금융자본주의의 화이트칼라 범죄-금융노동자가 아닌- 권력과 토지귀족 등에 의해 벌어지는 범죄는
우리들의 인식 바깥에 있다. 정확히는 계급인식 바깥에 있는 셈이다.
둔감해지기 이전에 그러한 금융의 작동방식을 모르거나 낌새를 채지 못한다.
해서, 우리가 선택적 분노라 부르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상위계급 범죄에 대한 둔감함이거나
사회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인식의 지연 혹은
혹은 그러한 계급범죄를 당연시해온 노예근성이거나 식민지 근성에서 비롯된다.
그저 자신 계급의 내부라고 판단되는 계급에 대해서만 분노한다.
'조국'현상을 쳐다보면 그렇다.
자신의 계급 혹은 그 이하라고 느끼는 만만함이거나,
내 목을 조을 일이 없는 토지귀족이나 관료귀족이 아닌 무권력자이거나,
혹은 산업자본주의의 초입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신이 속하고 알고 있는 딱 그 지점과 수준에서만 분노한다, 혹은 분노로 위장한다.
해서 오랜동안 양반네 (혹은 토지귀족, 관료귀족)들이 벌여온 범죄,
특히나 금융범죄 혐의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미 그런 시절임에도. 우리의 분노 프레임은 과거에 머물러 있고,
계급인식은 자신의 내부에만 머물러 있다.
가까이는,
검찰 출신 모 국회의원 아들의 기 십 억의 퇴직금이 그러하고,
얼굴도 확인하지 못하는 검찰 출신 법기술자의 성범죄의 혐의가 그러하고,
오랜 토착 토호 아들의 음주운전 운전자 바꿔치기가 그러하다.
그들은 계급의 변주를 통해
때로는 법이 아니라 도덕을 들먹이며 탈색시킨다. 범죄의 흔적을.
세상에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토지와 관료와 귀족일 터이고, 이를 결합하는 토지귀족, 관료귀족일 터인데,
우리의 인식은 농경사회의 노예제 수준의 인식으로 제한당해 있거나 실제로 그러한 수준에서만 작동한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계급의 일시적 붕괴 혹은 시간적 지연이
다시금 되살아나며 이러한 프레임이 계급사회로의 귀환과 더불어 복고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임의 생산자들이 만드는 프레임에
지연된 인식과 계급 내부에 대해서만의 선택적 분노는 왜곡되어 계급사회로의 귀환을 가속화한다.
프레임의 소비자는 그렇게 소모된다.
맞거나 어쩌거나 나의 눈에는 그렇다.
시절을 따라가지 못하는. 바뀌어진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의 인식이 유발하는 선택적 분노.
혹은 나보다 약한 자에게 보내는 정의라 이름 지어 부르는 나의 오만함.
시인이 왜 그리 노래했겠는가?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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