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했던 시인 한 분이 어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89년쯤인가 아현동 막걸리 집에서 한 번 인사하고는 그 뒤로 다시 한 번인가 더 보았던 사람.
그 사람 허수경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자기 밀려오는 이 허전함은,
동갑내기 시인에게서 느꼈던 시대의 감수성에 대한 상실이라기 보다는
고향땅 어딘가에 있을 법한 선술집 하나가 사라진 듯한데서 나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래된 시집을 꺼내어 든다.
생경한 나의 20대가 거기에 묻어있다.
무언가 서툴렀다면 그것은 시대와의 불화라기 보다는
기나긴 싸움을 짧게 성급히 가져간 탓이리라.
어느 여정인들 고달프지 않으랴.
그것이 나에게만의 일이 아니었음은 위안도 절망도 아닌 그저 우리 삶의 원래가 그러기에.
삼가 또 삼가 그이의 명복을 빈다.
잘가라, 그대. 끝나지 않을, 고단했던 시대의 아픔이여.
당신의 20대로 하여 나는 늘 행복하였음에.
1988년 12월 23일, 시집을 읽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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