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뻘골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새뻘골의 동사무소 한 골목 전에 대본소가 있었다.
대부분 검거나 빨간 제본의 무협지가 대본소 주인이 짜맞춘 나무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와룡생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무릇 무협작가는 성이 두 자에 이름은 외자이어야 하는 법, 와룡, 사마, ......
(두 자의 성은 북방 유목 민족의 성이라는 설이 있다.)
처음 빌려 본 무협지가 와룡생의 작품이었지만, 아니 그이의 위작일 가능성이 더 높을 터이지만,
그 제목은 기억나질 않는다. 초등 5학년 즈음으로 기억된다.
우연히 <공산영우>라는무협영화를 접했다.
엄밀하게는 무협의 외피를 띄고 있는 영화이고, 어찌보면 空이거나 무욕을 설하는 영화같기도 하다.
우선 해인사?와 불국사가 나오는 장면부터 종묘를 거쳐, 또 한국의 좌식 법당으로 중국식-대만식의- 입식 법당을 촬영했다는 것이 낯 설었다. 1979년의 일이다.
무협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칼 싸움 정도였고 붕붕 날아다니는 어줍잖은 꼴은 볼 일이 없다.
대신 호금전의 영화가 그렇듯 온가지 인간의 음모와 술수가 욕망의 거죽 위에 실타래를 푼다.
국내 개봉 제목은 <사문의 승객>이었다고 한다. 死門의 僧客이라는 공포영화같은 제목을 달고 있다.
沙門 쯤으로 번역해야 할 듯 한데.....왜 저런 제목이었는지는.
이 영화의 감독은 1967년 전설의 <용문객잔>을 감독했다.
<용문객잔>은 후속편격인 <신 용문객잔>을 먼저본 탓에 스토리는 익숙하고도 낯설다.
1967년이라는 시점을 생각하면 이 정도 스케일과 촬영이 가능했다는 게 경이롭다.
얄궂은 컴퓨터 그래픽이 없이 비단결처럼 흘러가는 칼 싸움은 진정 무협의 아름다움과
철기시대의 개인이 지닐 수 있는 능력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조금은 신경 거슬리는 음악은 긴장감을 높여주고.
대신 시원한 한 칼은 마지막까지 아낀다.
나는 나레이션의 중국식 성조가 깔리는 영화의 도입을 좋아한다. 용문객잔의 처음에 보여주는....
따지고 보면 <소오강호> 역시 호금전 감독의 프레임과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영화 아니던가. 서극 감독이 마지막을 정리했다해도.
이혜민 감독의 <신 용문객잔>은 여튼 장만옥이 나왔기에, <화양연화>에서나 여기서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나는. <신용문객잔>은 장만옥의 연기만으로도 아쉽지 않다. <용문객잔>의 내용을 좀더 무협스럽게 만든 영화이다.
그러고는 <용문갑비>에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피리를 들고 따라갔던 그 장만옥은. 대신 저우쉰의 애절함이 그 아쉬움을 달랜다. 이제는 낡아버린 피리와 더불어. 그 피리는 다음을 기약하지만 우리의 장만옥은 이제 객잔에서 볼 일은 없을 듯 하다.
<용문객잔>은 시절을 떠나서 언제고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삶의 한 관문이다.
권력을 쥔 자와 권력을 빼앗긴 자가 부딪히는.
그러나 영화는, 현실이 더 잔인할 터이지만, 현실보다 잔인하게 그려진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이들, 손님을 접대하는 이들, 그리고 권력의 칼 싸움과 무의미한 화살촉에 쓰러져가는 병사들.....
누군들 세상의 주인이고 싶지 않을까마는.
어느 누가 권력을 쥐어도 옅은 배색의 엑스트라는 관계없이 수탈당한다. 아니 죽음으로 밑그림을 이룬다.
그것은 영화에서 보다 현실에서 더욱 극명하다.
그런 모습을 영화가 보여줄 때 조차,
우리는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권력자나 반권력자의 상태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다.
차라리 <용문객잔>의 스산한 그 건물만이 그런 착각을 조금씩 조금씩 버텨내게 하는 힘이다.
누구는 죽고 또 누군가는 살아가는 그 흐릿한 착각은 영화의 재미로 그치지만,
수없이 의미없이 죽어간, 또 죽어갈 현실의 엑스트라는
오늘도 <용문객잔>으로 스며든다. 혹은 새로운 시절의 <신용문객잔>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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