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속의 전쟁, 마이클 하워드, 안두환 옮김, 글항아리
제1장 기사들의 전쟁
한 중세사가는 '유럽의 기원은 전쟁의 모루로부터 주조되었다'라는 점을 ...상기시켜줬다.
...13세기 이전까지 평화는, 이를테면 기독교 교회들이 예배를 통해 진심으로 소망했던 바로 그 평화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예외적이고 위태로운 오아시스처럼 존재했다.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 유럽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사회양식이 잉태되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양식을 봉건제 Feudalism 라 일컬었다. (14-15쪽)
'봉건제'는 군사적 필요뿐만 아니라 경제적 필요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역사상 중요한 지중해의 무역지대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토막나면서 경제활동은 쇠락했고,
이는 곧 9세기가 시작될 즈음, 유럽에서 정화 specie가 희귀했으며,
토지만이 유일한 부의 근원이었음을 의미했다.
...기동성은 말만이 제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8세기에 들어 등자가 프랑크족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면서
말은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닌 전쟁의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8세기와 9세기 동안 제대로 싸울 수 있었던 군인, 즉 헤이릴 가치가 있었던 군인miles은 말을 탄 전사인 기사뿐이었다.
...866년 샤를마뉴는 자신의 수봉자들tenants-in-chief를 호출하면서 말을 타고 참석하라고 명했으며,...
이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고비용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16쪽)
장기간 걸친 출정을 위해서는...기사는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난 창, 검, 투구, 방패 등의 수화물을 다루고 짊어지기 위해....
한명의 기사는 마치 거대한 전차의 전차병들처럼 여섯 명으로 구성된 한 팀, 즉 랜스 lance로 확장되었다.
이 모든 것을 갖추자면 실로 엄청난 비용....생계유지 수준의 경제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없었다.
10세기에 이르면서 전쟁은 유년시절부터 훈련받은 부유한 전문가의 일이 되어갔다. (19쪽)
영주에게는 복종과 '충성'을 맹세한 대가로 하사되었던 토지가 있었다.
'봉토fief'라 불린 이 토지는 봉건사회의 기초였다. 즉, 군사적 전문화, 토지보유권, 개인적 의무의 삼각관계가 성립되었으며....(21쪽)
이 전사계급의 후예들, 상호 결혼과 새로운 인원의 충원을 통해 자신의 힘을 증대시켜왔던
수백여 가문들은 16세기까지 유럽의 토지를 지배했으며 18세기까지 정치권력을 독점했다....
하지만 중세 내내 이는 ( 토지의 지배와 상징물을 방패에 세긴 귀족의 표상) '기능function'을 의미하는 징표였으며,
따라서 이 기능을 수행하는 모든 이들에게 부여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유럽의 귀족은 폐쇄적 세습계급이 아니었으며, 전쟁은 여전히 재능있는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직업이었다. (22쪽)
독특한 게르만 전사와 라틴 성직자의 융합은 모든 중세문화의 근저에 놓여 있었다.
...이와 동시에 성직에 있는 이들은 전쟁을 치르는 방식과 기독교 도덕을 논쟁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23쪽)
중세의 토지 소유에 따른 권리와 책무, 의무와 충성의 망은 끝없는 다툼을 낳았고,
명확한 법과 법 집행의 체제가 결여된 상황에서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권리를 전장에서 판가름 내고자 했다.
그와 같은 싸움은 신에게 결정을 호소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개인 사이의 사적 전쟁과 군주들에 의해 행해진 공적 전쟁의 구분은 로마법 개념의 영향 아래에서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25쪽)
14세기에 이르면서 전쟁의 수행에 관한 법률과 규제는...부분적으로 교회의 압력으로 인해, 또 점차 증대하고 있었던 로마법의 영향에 따라,
그리고 없어서는 안될 전문가인 기사들의 변호사들, 즉 헤럴드들Heralds에 의해 수세기 동안 진행되어온 관례의 법제화에 따라 마련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성문화가 가속화된 것은 사실 기독교나 법 혹은 기사도적 양심의 추구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발전 과정인 전쟁의 상업화에 따른 것이었다. 몸값과 노획물을 더 이상 유쾌한 보상이 아니라 전쟁의 주된 목적으로 여기는 이들의 수가 늘어났다. (27쪽)...봉건제의 엄밀한 구성에 따른다고 해도 전쟁은 사회의 모든 계급에 걸쳐 돈이 주된 목적인 일 가운데 하나가될 수 있었다. (28쪽)
15세기에 이르면서 ...향후 500여년 동안 전쟁의 수행을 지배할 두 무기인 대포와 총이...
당시 사람들은 대포와 총에 대해 적잖은 불만을 토로했다. 이는 단순히 이들 무기가 비인간적인 파괴력을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무기로 인해 고귀한 중기병의 목숨이 비열하고 미천한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면서 전쟁의 품위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43-44쪽_)
전쟁자금은 동원될 필요가 없었던 봉신들로부터 대신 거둔 병역 면제세나 세금 혹은 교회로부터 받은 교부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전비의 상당부분은 무역수입으로부터 거두어져야 했다. 즉 전비는 군주의 완전한 통제권 아래 있었던 세금이나 상인들의 대부금 혹은
도시의 대표자들이나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계급이 기부한 특정한 보조금-대개 도움이나 주어진 특권에 대한 대가-에 의해 마련되었다.
점차 사회의 비군사적인 계층과 평민 계층을 대표하는 의회Parliaments나 신분제회의Estates 혹은 하원assemblies이
군주의 전쟁능력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54쪽)
프랑스 신분제회의는 그 첫 교부금을 1439년 샤를 7세에게 줬다. ...농촌지역에 우글거리던 용병 떼거리들 중 일부를
영구적으로 왕실에 봉사하는 군대로 수용하도록 칙령을 내렸으며...
이러한 왕실 칙령군은 봉건적 의무나 각 부대장이 자기 몫의 총액에 따라 군대를 모집하고 급료를 지급하는 '고용계약indenture'에 따르지 않았다. ...
장교와 사병 모두 국왕으로부터 직접 보수를 받았다. ...이들은 완전한 유급군대였지만 아직 국민군은 아니었다. (55쪽)
...기사들의 전쟁은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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