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을 의義엄마로 둔 나로서는 방법하는 데에 익숙하다.
의엄마는 만신이시라기 보다는 개인 사찰의 회주보살에 가까운 분이셨다.
(대처, 아닌 대남을 하고 머리를 깎지 않으셨으나
승속의 경계에 계셨던 분이셨다.)
서낭대가 꽂힌 요사채에서 휘파람을 후이후이 불며 동자신을 불러 쌀점을 보시거나
때로는 안풀리는 집집을 돌며 굿판을 벌이기도 하셨다.
알사탕의 동자신은 기억하겠지만, 최영장군님을 모셨든가 기억은 가물가물하나
신칼의 은빛 무구와 다섯 빛깔 종이꽃과 무명천에 용선을 끌던 살풀이의 기억은 선명하고 새록하다.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을 때, 할머니는얼른 접시위의 생선 가시를 정수리에 올려주셨다.
(나는 그런 가시걸림을 빼려고 응급실을 몇 번 간 적이 있다.
그러나 인체는 알 수 없는 신비로 응급실에 기다리는 동안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한다.
의사를 만나기도 전에. 늘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된 동일체 혹은 더 센 가시로 작은 가시를 제압하는 방법이랄 수 있는가 하면
다래끼가 났을 때, 속눈썹을 뽑에 네거리 길가에 삼층 돌탑을 올려 그 속에 얹어 두면
누군가 그 돌탑을 발로 찬 사람이 나의 다래끼를 가져간다는 질병 전이의 방법도 한다.
(미운 놈을 기다렸다거나 한 것으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숨어서 지켜보는 것도 한 두번이지.)
물론 엄지 발가락에 실반지를 묶고 엄지 발톱에 X 자를 바늘로 긁어 두는 방법도 한다.
이 경우라면 다래끼 난 눈의 반대편에다 방법을 해야 한다.
(간혹 발바닥에 하늘 天글자나 땅 地 글자를 써두어 방법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문자 깨나 하는 양반들이 하는 방법으로 보인다.)
이것은 동일한 신체의 극과 극, 혹은 보완의 곳에다 방법을 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방법을 해도 잘 낫지 않으면,
(대개는 2단계의 방법을 하기 전에 낫는다. 물론 시간이 흘러서일 수 있다.)
붕어그림을 그려 마루기둥에 붙이고 바늘로 늘 뜬눈으로 있다는 붕어 눈깔에다 꽂아둔다.
자연의 대상, 그리고 그 동일한 질병원에다 나의 다래끼를 옮기는 방법이리라.
혹은 병의 근원이 그곳이고 바로 그곳에 일침을 가하는 방법을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리라.
첫째인가가 밤잠이 없이 아기 배앓이를 오래 한 적이었던 것 같다.
밤을 새워 늘 유모차를 끌고 동네를 돌곤 했다. 그러고 새벽 출근하고 또 밤이면 반복되는 그 시간들.
그 때인가 하였던 방법은 종이에 홰치는 장닭을 그려 이부자리 요 밑에 넣어두라는 것이었다.
(서울대 산업디자인과인가 다녔던 예전 하숙집 아들래미에게 부탁하여 그렸으니
염厭의 힘이 잘그린 그림으로 탁월하거나 남다른 탓도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성질이 중화를 한다는 개념이거나
혹은 새벽 시간을 제대로 알고 있는 뭇짐승인 달구처럼 시간을 알아달라는 바램이 깃든 방법이라 생각된다.
그런 방법을 한 때문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로 첫째는 배앓이 울음 없이 잘 잠든 것 같다.
효과는 바로 나타난다. 방법을 하면 그렇다.
그 효험좋았던 방법 그림은 태웠던가 어쨌던가 하였다.
돌멩이 맞아 머리통이 깨지면 된장을 바르고 하는 것은 방법을 한 게 아니다.
그것은 민간 요법일 것이다. 큰 의미에서는 방법의 한 종류일지도.
다만 개에게 물리면 그 개의 꼬리털을 잘라 그슬러서 참기름에 개어 발랐던 기억이 있다.
이 역시 원인제공의 한 부분을 가져와 낫게 하는 식으로 방법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방법하는 것은 동네 이발사 아저씨들이 곧잘하였다. 방술사라고나 할까?
지금은 없어진 '천벌 받을 놈'이란 분노처럼,
우리의 마음을 위무하던 무속과 방법하는 법이 우리 곁에서 사라진지 좀 되었다.
서양식 의료가 보편화되고 (과학적이라서기 보다는 비용이 싸져서라는 게 나의 생각이지만)
이제는 무언가 고치지 못할 것,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을 거라는 자만에 빠진다.
그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스스로의 나약함에 어쩌지 못할 때,
어느새 예전의 시장통 약장수 앞에 서있어 흠칫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된다.
방법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서양식의 정신과 치료가 그 효과와는 별개로 여전히 알 수 없이 비싸다고 느끼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P/S
최근 킨들버그의 글에서 쇠퇴하는 사회가 미신화된다는 구절을 읽었다.
(실제의 영어 무엇에서 번역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망쪼가 드는 데는 성공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와 그 향수에 집착하는 고집의 관성이
변화하는 시절에 대응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죽던 그 해 1919년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증명하는 일식사진을 찍었던 이들이 있었다.
한 사회가 무속과, 그리고 저만의 권위에 기대고 있던 시절에
과학의 나날은 여지없이 시공간을 왜곡시키며-엄밀히는 왜곡된 시공간이겠지만- 굴러갔다.
왜곡된 시공간은 중력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동과 서의 장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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