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세상 모든 병폐의 기원, 특히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민족의 문제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도 명쾌하지도 않은 것이어서, 누군들 그러한 단순한 재단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일그러진 바탕이 해소된다면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다른 문제가, 요컨대 질곡이라 이름지어 부를만한 것들이,
해결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한 시절을 보낸 탓에 통합적 시각을 획득하지 못했을까? 아니,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세상 살아오면서 자본모순이 이제 모든 모순에 앞선다는 생각이 굳어버렸다.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와는 별개로.
기실 한국 사회가 그런 모순을 표출하고 있다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모순을 놓고 본다면
소위 페미로 불리우는 남녀 모순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모순의 축임에 틀림없다.
지향점과 방편에 대해서는 참으로 고민스럽지만.
행복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자본모순의 해결이 종국적 해법이 되지 못할 것임만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고 남녀모순은 오랜 역사의 더깨 깥은 것이기도 하려니와
근대 이후에 노출되기 시작한 뒤늦은 인식의 산물이기도 하다. (남자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얘기이다.)
연쇄반응을 생각한다면 자본모순의 해결이 남녀모순의 해결을 촉발하거나 가속시키거나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역반응은 가능할까? 인간의 측면에서는 가능해보인다. 가능해 보일 것이란 희망을 품어본다.
그런 점에서 남녀 모순을 기본적인 모순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전체적 시각에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생태적인 관점 같은 것일지도.
점차 계급화되고 퇴행해가는 한국사회에서 남녀모순의 해결을 선결과제로 삼는 것은
세련된 수사를 떠나 의미있는 행보일 것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도 없거니와 한 번에 해결할 수도 없을 것이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약한 고리를 여하히 연쇄 점화할 것인지의 집중은 필요할 터.
그런 점에서 이 시각이 의미있는 인식의 바탕이라고 믿는다.
특히나 자본의 욕망이 질곡의 블랙홀 같이 퇴행하는 사회에서.
P/S
이 글을 쓴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날에 서울 시장에 출마했던 한 페미 여성이 배를 갈아탔다.
보수적인 양당체제가 굳어가는 한국에서 배를 갈아타든, 차를 갈아타든 그 지향이 별반 다를 것이 없음에도,
이 여성이 보인 행보는 (그이의 수준에서이겠지만) 철학의 빈곤과
(그이를 포함하여 그이의 진영 모두가 겪어온) 현실의 고단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탕에서부터의 철학과 훈련이 없으면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고,
그이 한 사람의 행보가 전체를 웅변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여튼, 그로 인한 전체적인 시각과 문제의식은 한 발자욱 퇴보한 것임에는 분명해보인다.
그럼에도 큰 물줄기는 결국 낮은 곳으로 흐르리라.
부평초는 흘러 바다로 스며들고 큰 물은 도랑을 거절하는 법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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