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이 나아지지는 않았었고, 않았고, 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는 않는다.
5년 정도의 시간은 설사 고난의 시간이 될 수 있을 지라도,
나의 권리와 나의 부분적인 주권의 양도를 생각할 때
장기적 전망에서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쪽을 찍어야 한다.
'될성부른'에 이득을 보는 쪽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진보'라는 탈을 쓰고 있는 '보수'와
또 '보수'라고 우격다짐하는 '식민지 잔재'들.
어느 쪽이든 모두 기득권층이다.
모두 이 '될성부른'에 기생한다.
여기에 서울에서의 중산층이라고 믿고 싶은,
부동산 계급이 가세한다.
타인의 고통에 기반한 그 소유욕을 애써 외면하면서
'보통시민'을 가장한다.
이들 역시 '될성부른'으로 자신의 물욕을 치환시킨다.
그러나 정녕코 그러나
사회전체의 이익과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일치시키는 훈련을 통해
기꺼이 '될성부른'으로 벗어나 나를 온전히 던져보는 일
또 이어지는 5년이 고난의 길이 된다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세상이 좀더 달라질 기회를 얻는다.
될성부른 쪽이 아니라,
앞으로의 나날을 위해,
던져지지 않은 계란은
바위 앞에서 그냥 계란으로 남지만
될성부르지 않아도
던져진 계란만이
바위에 균열을 터뜨리는 쐐기로 남을 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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