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깨어진 유리창에

의지의 가치, 될성부른 쪽을 찍었어도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5. 4. 7. 19:10

나의 인생이 나아지지는 않았었고, 않았고, 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는 않는다. 

 

5년 정도의 시간은 설사 고난의 시간이 될 수 있을 지라도,

 

나의 권리와 나의 부분적인 주권의 양도를 생각할 때

장기적 전망에서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쪽을 찍어야 한다. 

 

'될성부른'에 이득을 보는 쪽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진보'라는 탈을 쓰고 있는 '보수'와

또 '보수'라고 우격다짐하는 '식민지 잔재'들.

어느 쪽이든 모두 기득권층이다.

모두 이 '될성부른'에 기생한다.

 

여기에 서울에서의 중산층이라고 믿고 싶은,

부동산 계급이 가세한다. 알량하다는 표현이 여기만큼 적절할 수가 없다.

타인의 고통에 기반한 그 소유욕을 애써 외면하면서

'보통시민'을 가장한다.

이들 역시 '될성부른'으로 자신의 물욕을 치환시키며,

진보를 호명한다.

 

그러나 정녕코 그러나

사회전체의 이익과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일치시키는 훈련을 통해

기꺼이 '될성부른'으로 벗어나 나를 온전히 던져보는 일

또 이어지는 5년이 고난의 길이 된다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세상이 좀더 달라질 기회를 얻게 될 터이기에.

 

될성부른 쪽이 아니라,

되어야 할 앞으로의 나날을 위해,

사회의 이익과 일치되는 나의 의지의 가치를 챙겨둘 일이다. 

 

던져지지 않은 계란은

바위 앞에서 그냥 계란으로 남지만

될성부르지 않아도

던져진 계란만이

바위에 균열을 터뜨리는 쐐기로 남을 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