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만든 은둔자들
수도원의 탄생, 크리스토퍼 브룩 지음, 이한우 옮김, 청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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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경제가 중세의 그것과 연동되는 부분은 관심거리이다.
도시화와 (아마도 분업을 전제하는 것이겠지만) 상업의 발달은
세속의 파고를 수도원 또한 피해가지 못함을 보여준다.
아니, 오히려 (종교의 외피를 쓰고 있어도) 더 세속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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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수도원과 속세
(127쪽) 클뤼니, 고르즈,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던 베네딕트회 수도원 운동은 900년과 1050년 사이에 계속 퍼져 나갔고 융성했다… 1150년과 1300년 사이에 수도원과 수도사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탁발 수도회들이 수도회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28쪽) 수도원의 첫 번째 팽창은 왕과 귀족 중심의 전통적인 권력 형태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129쪽) 수도원은 10세기 말과 11세기 초의 종교관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오직 수도사만이 구원에 대한 희망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다는 견해가 11세기말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130쪽) 한편 수도원의 넓은 소유지는 세속의 영주들보다 왕의 권위에 의해 훨씬 주도면밀하게 통제될 수 있었고, 또 수도원들은 군대를 지원하기도 했다.
(131쪽) 프랑스에서는 왕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그러나 수도원장들은 프랑스왕에게 충성의 의무를 다할 필요가 없는 국경 지역인 마콘네 지방에 살았다. 그들의 대수도원은 아키텐 지방의 공작에 의해 부르고뉴 지방의 땅에 설립되었다. 따라서 대수도원의 설립자는 자신과 경쟁적인 위치에 있는 왕가에 대한 세속적이니 의무에서 대수도원장들을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수도원장들은 자신들의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교황의 힘을 빌려 로마 교황의 통제를 제외한 모든 세속적인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 (132쪽) 으로는 넓은 토지와 클뤼니 수도원의 통제하에 있었던 수많은 교회들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군주들 및 주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 독일과 영국 수도원들의 공통점은 세속의 권력자가 수도원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다는 점인데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수도원들에서도 이러한 공통점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또한 모든 수도원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기도를 올리는 수도사들과 노동을 통해 그들에게 식량을 비롯한 물질적인 토대를 공급해 주었던 농부들 사이에 임무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사회적 대립도 존재했다는 점이다.
(134쪽) 당시는 선택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 사회였다. … 농부의농부의 아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일한 땅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따라서 11세기와 12세기의 인구증가는 심한 사회 변화를 유발한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나이가 어린 자식들을 수도원에 맡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수도원 생활방식을 받아들였고 그들 모두는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러한 생황을 그만두고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우리가 11세기 초반의 많은 수도원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놀랄만한 특징은 다수의 수도사들이 자신의 자유의사로 수도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적어도 수도사가 되는 순간만큼은 선택의 자유를 갖지 못했다.
(138쪽) 우리는 일반적으로 서유럽의 인구증가가 1050년경에 큰 폭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고…이 시기 인구증가의 근본 원인을 밝혀내는 것은 무리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가능성은 중세의 인구 증가 배경을 그나마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이 다소 평화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이고… 주목할만한 점은 인구 증가와 동시에 유럽 여러 지역에서 경제성장이 현저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39쪽)…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지극히 정적으로 보이는 사회에 변화를 일으킨 요소들 가운데 한 요소, 그것도 결정적인 요소가 인구 증가이다.
수도원과 도시는 중세 이 시기의 특징적인 변화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곳이다.
…(140쪽) 도시의 부흥으로 생활 패턴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도시가 사회 현실의 한 요소로 다시 기능을 발휘하면서 생활 패턴이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도시의 주민들과 더 이상 식량을 직접 조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상설 시장에서 곡식을 살 수 있었다. …영주 뿐만 아니라 … 성직자,수도사에게도 돈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141쪽) …1050년과 12세기말 사이에.... 수도원 수의 증가…모든 생활영역에서 지방영주 (142쪽)들과 기사들, 도시거주민과 시민들, 그리고 농부들의 성장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개발 도상에 있는 사회를 기준으로 삼아도 성장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 인구증가가 경쟁의 심화를 의미하고 이러한 사회에서 아이들을 먹여 살릴 방도를 찾을 수 없었던 집안의 가장들 때문에 수도원 거주자 수가 어느 정도 증가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이미 10세기와 11세기 귀족층의 독일 여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풍조, 귀족 신분의 여자들이 몇몇 수도원을 독점하는 풍조가 이 시기에 유럽의 몇몇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43쪽) 귀족의 관심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수도사들과 수녀들이 주로 부유층에서 충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영국의 귀족층은 철저히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역사에서 이 시대와 매우 유사했던 4세기를 다시 돌이켜 본다면 이 시대의 놀랍고도 불가사의한 수도원의 성장은 …오리게네스에 의해 주창되었고…제자들이 장려했던 고행을 추구하는 지적이고 영적인 노력이 있었다. 또한 4세기는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어 가는 번영기(144쪽)였고,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세속적인 사고가 퍼져 나가는 시기였다….
…부의 급격한 성장, 최소한 인구의 급격한 성장은 경제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급격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 시대의 모든 종교 운동을 주도했던 수도사들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성경 말씀은 “마음이 가는 한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였다.
사람들은 부자가 될수록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변사람들을 위해서도 지옥에서 겪게 되는 부자의 고통이나 바늘귀에 대해 더 많은 두려움을 갖게 마련이다…. 늘어난 부는 수도원 건립에 필요한 자금조달에 크게 기여했다.
…(145쪽) 더 이상 왕들과 귀족들이 후원을 독점하지 않게 되었다.
… 교황청이 주도한 개혁과 경제력 향상은… 교황들은 성직자는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성직자가 수도사가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규칙에 준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여자와 돈이라는 세속의 유혹에서 성직자들을 떼어 놓는 것이었다.
(153쪽) 클뤼니 수도원이 경제적 부침은 수도원의 토지와 수도원 주변에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웅장한 교회를 밝히는 데 필요했던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초들 덕택에 넓은 지역에 흩어져있던 양봉업자들도 먹고 살아갈 수 있었다. 교회의 성배에 채워졌고, 식당의 탁자 위에 놓였던 포도주는 부르고뉴 지방의 포도재배를 촉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