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제1권력2 자본, 그들은 어떻게 혁명을 삼켜버렸는가 – ‘로마노프가의 황금’은 공산주의에서 제정으로 돌아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변함없이 엄중하게 관리되어 왔다.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1. 23. 00:09

제1권력2 자본, 그들은 어떻게 혁명을 삼켜버렸는가 – ‘로마노프가의 황금은 공산주의에서 제정으로 돌아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변함없이 엄중하게 관리되어 왔다.

1권력2 자본, 그들은 어떻게 혁명을 삼켜버렸는가, 히로세 다카시 지음, 김소연 옮김, 프로메테우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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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어도 귀족, 관료, 토지와 자본은 역사의 피하에서 보존되었다는 어느 언설에 대한 실증적 자료이다.

다만, 귀족의 가문에서 혁명아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으나, 

흐름의 과정에서 귀족의 등용은 척결되거나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의 사정과 다를 바 없음을 본다.

 

저자의 이런 가계 중심의 파악은 일본의 가계 중심의 역사인식의 흔적과 연관된 것은 아닌지는 짚어볼 일이다.

(다만, 한국의 가계도는 관료와 자본에 가려져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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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

 

로마노프 가, 그것은쌍두의 매를 문장으로 삼으며 300년간 번영을 누려온 제정러시아 왕조였다. 사실상 이 300년 왕조는 러시아 2월 혁명 (191738)에 의해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한 후, 10월 혁명으로 인해 황제일가가 처형되고 그 일족이 단절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아니,멸망한 것처럼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1991년 말 소련이 붕괴한  후 흔들리는 신생 러시아에 대두한 것은 분명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기승을 부리는 극우주의에 호응하듯 제정러시아 시대의 황제를 복고시키려고 획책하는 거대 집단의 움직임이었다.

러시아는 여전히 세계 최대의 자원국이다. 숫자로 나타내보면 1991년 붕괴된 소련의 연간 원유생산량은 약 45억 배럴, 천연가스 매장량은 약 40조 입방미터로 가히 모두 세계 최고였다. 석탄 생산량도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게 3위인 5억 톤이다. 이들 대부분이 러시아 존재한다.

1663년에 파리에서 발행된 한 권의 책에서만큼은 흐루시초프와 로마노프 가의 관계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러시아 귀족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노동자 흐루시초프가 러시아 귀족이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믿는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우크라이나 지방의 카바니란 작은 마을에 카가노비치 일족이 살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카가노비치는 독재자 스탈린의 오른팔이 되어 숙청을 실행에 옮겼고, 곧이어 이 카가노비치가 우크라이나의 흐루시초프를 출세시켰다. 이후 흐루시초프가 같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브레주네프를 출세시켰는데, 이런 과정에 보이는 공통점은 그들 우크라이나 인맥이 항상 은인이었던 전임자를 실각시키고 자신이 주도권을 쥐었다는 것, 그러나 실각된 사람은 결코 숙청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가노비치가 혁명 후의 소련에서 실력자로 떠오른 데에는 공산당 간부의 과반수를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따지고 보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노린 것도 우크라이나 일대의 식량 생산지였으며, 제정러시아의 반격을 지휘하던 백군 데니킨 장군이 볼셰비키를 교수대에 매달면서 전국을 점령한 것 또한 카가노비치 형제를 낳은 우크라이나였다. 그리고 이 지방의 전선에서 적군의 특별대대 사령관으로 활약했던 인물이 또다시 니키다 흐루시초프였던 것이다.

 

레닌

 

어쨌든 지금이야말로 레닌을 귀족으로 재평가해야 할 때이다. 이 혁명의 아버지 레닌이 소련의 외무장관으로귀족치체린을 등용했을 뿐만 아니라 적군 총사령관으로 귀족투하체프스키가 취임하고 비밀경찰 체카의 초대장관이 귀족제르진스키였던 사실을 안다면, 종종 사용된 계급투쟁이라는 용어가 실제로는 고통받는 하층계급 사람들에게 향해진 투쟁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트로츠키

 

또 한 사람의 혁명아 레프 트로츠키도 마찬가지다. …유대인이 귀족세계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었던 제정러시아에서 …. 어머니의 사촌이 남러시아 최대의 출판사주 모이세이 스펜젤이며 일족이 유대인 가운데서도 특권층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광대한 영토를 관리하던 사람이 트로츠키의 아버지 다비드였다.

 

막심 고리키

 

알렉세이 페시코프가 본명인 고리키는  카가노비치 형제가 근거지로 삼았던 니주니노브고로트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방랑하던 고리키가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맛보았는지는 그의 작품에 있는 그대로 그려졌다.그런데 이 위대한 작가가 왜 1990년대 이후 러시아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아온 것일까? 그 이유는… 비단 그는 비밀경찰의 활동에 박수를 보내고 스탈린을 찬미한 것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농민 자체를 경멸하고 대축청이 자행되던 시대에 살인자에게 권위를 주기 위한 어용작가로 활동한 것이 고리키였다는 사실이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지만, 만일 그 사실을 글라스노스트 안에서 러시아인 스스로 고발해서 밝혀내지 않았다면 전 세계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고리키의 양자 지노비 페시코프의 여동생 소피야 스베르들로바가 시집간) 겐리흐 야고다가 1920suseoo 초부터 크렘린 내에서 출세해 마침내 비밀경찰 체카의 간부로 승진한 것이다. 저명한 혁명가인 삼촌스베르들로프가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의장이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일족의 출세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고리키의 도시 (니주니노브고로트)에는 비밀기관 양성학교인 마르크스.엥겔스 학교가 건설되어 나중에 KGB 공작원을 위한 요인 유괴, 암살에서부터 암호처리, 시한폭탄, 도청, 군사기밀수집에 이르는 고도의 기술이 이 학교에서 교육되었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야고다는 1934년 이러한 첩보.비밀경찰의 보스 격인 NKVD의 장관자리까지 올라갔다.

요약하자면 1930년대에 스탈린의 하수인으로서 대숙청을 실행하면서 출세를 거듭한 이가 바로 작가 고리키 일족의 야고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