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귀족의 역사?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18. 1. 25. 18:00

친일파를 논하기에 앞서

귀족을 논하는 것이 타당하리란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차라리

오늘의 한국 현대와 현대사의 맥락을 규정하기에 적절해 보일 수 있다.


매우 거칠게 정리해 보자면,

조선은 국가 지배체제가 아니라,

귀족(양반)에 의한 지역분할 가문 지배 체제에 가까왔고,

이네들은 한일 병합 조약시 귀족의 지위를 보장받으며

새로운 지배체제에서의 가문의 영속을 확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이래로 최근까지 사실상의 국가나 민족의 개념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우리가 실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민족 개념을 통한 독재의 합리화를 위해 급조된 개념으로 이해된다.

한국 근대의 맹아라고 칭해지는 실학이나 조선 후기 자본의 발달도 따지고 보면

보부상에 의한 개인 상업활동이거나 소농이나 지역농과 이의 경영이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면,

민족 혹은 국가의 개념이 부재한 상황에서 근대라고 칭하기는 어렵겠거니와,

조선의 양반 지배가 사회경제적 의미에서 귀족의 지배로 변형되었다고 보아진다.


한국전쟁 이후에 사회경제적 체계가 Reset 된 상황에서의

(계급 제도의 일시적 Reset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경제적 상화의 변화는 다시금 최근의 금수저론에서 보듯이

원상회복 - 귀족중심주의로의 회귀 -이 진행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나 귀족이 멸종한 적도 없거니와.

귀족의 지배가 아니었던 시절이 없었던 점에 비추어

모양과 형식을 바꾸어 지배계급으로 살아남아 왔음을 고려하여 본다면,

친일파에 대한 논의를 귀족계급에 대한 논의로 관점을 변용하여 살펴보는 것이

문제의 본질에 더 적확히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

해법 또한 그러하다.


'결국에는 집단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 국민적 편견과 애국심에서 벗어나'

'인류라는 거대하고 보편적인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이해관계와 인류 전체의 이해관계가 동일함을 아는 인간이라는 것'

 (엥겔스,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서문에서)에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는 미진입의 진행형이며,

여전히 우리는 근대에 진입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나의 기우는 저 산을 옮기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