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6, 결과 : 노동자에게는 모든 사람이 인간인 반면.......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18. 7. 8. 19:21

(143쪽)

그런데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수백 명을 제 수명보다 훨씬 일찍 부자연스럽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위치로 내몰 때,

즉 칼이나 총알 못지 않은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내몰 때,

수천 명에게서 생필품을 빼앗고 그들을 도저히 살 수 없는 위치로 몰아 넣을 때,

법의 완력을 이용해 그들을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묶어둘 때,

이 희생자 수천 명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상황이 지속되도록 허용할 때,

그럴 때 사회의 행위는 앞에서 말한 한 사람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살인이다......

이 사회가 자기 행위의 결과를 알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그 행위는 그저 과실치사가 아니라

살인이라는 것을 나는 입증할 것이고, 공식문서, 의회와 정부의 보고서를 인용해 나의 고발을 뒷받침할 것이다.


(162쪽)

다행스러운 점은 노동계급이 살아가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실무훈련으로 가능함으로써,

주입식 학교를 대체하고 학교와 연관된 혼란스러운 종교적 개념의 유해성을 제거할 뿐 아니라

노동자들을 영국 국민운동의 선봉에 세우기 까지 한다는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고, 더 중요하게는 사고와 행동의 어머니다.


(168쪽)

노동자는 돈을 벌기 위해, 노동 자체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을 벌기 위해 노동한다.


(174쪽)

영국 노동계습이 점차 영국 부르주아지와 완전히 다른 인종이 되어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는 상이한 두 인종인 것 만큼이나 서로 근본적으로 두 민족이다.


(175쪽)

노동자에게는 모든 사람이 인간인 반면 부르주아지에게는 노동자가 인간 이하인 존재다.


위 구절은 최근의 갑질- 이 단어는 계급구조의 현상을 개별적 인성 현상으로 대체시키는 우파의 프레임이다-현상이

왜 만연되어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언술이다.

그 현상은 소위 '재벌'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차별을 현실에서 인지한 중간계급-부르주아지-의 자연스런 노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