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연민수 편저, 보고사
중국에서는 280년 위 魏에 대신하여 진 晉 西晉이 전국토를 통일...이윽고 북방민족의 침입에 의해 남으로 쫓겨나 이후 중국의 왕조는 남북으로 나뉘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이를 기회로 동아시아 제민족은 점차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국가 형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31쪽)
5세기말에서 6세기에 걸쳐서 기나이(畿內)를 근거지로 하는 야마토(大和) 정권은...
6세기에 들어서면 신라의 대두가 현저하게 되고 역으로 백제는 수세에 몰리게 돼...
백제는 중국의 남조에 적극적으로 외교활동을 펴는 한편 야마토 정권과도 친교를 맺어 신라의 공세를 견제...
이러한 동아시아의 정치적 긴장 속에서 야마토 정권의 대백제 관계는 깊어지고 백제 문화가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야마토 정권은 가야제국으로부터 철자원 등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면서 친연관계를 맺고...
(일본) 국내의 통일이 진행됨에 따라 야마토 정권의 정치조직도 정비되어 갔다. 야마토 정권은 복속한 소국의 수장을 그대로 새로운 정치조직에 편입시키고 그들이 갖고 있던 토지와 백성을 통치케...유력호족의 연합정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호족들은 정권 내의 역할을 명확히 할 필요에서 그 근거지나 종사하는 일의 명칭을 따서 가쓰라기(葛城) 헤구리(平群)라든가 다마쓰쿠리(玉作) 인베(忌部 제사 관련 씨족) 등으로 불렸다. 이러한 동일한 명칭을 갖는 동족집단을 우지(氏)라 하고, 그 통솔자를 우지가미(氏上), 그 구성원을 우지비토(氏人)라 불렀다.
우지(氏)의 지배하에는 가키베(部曲)이라 하는 농민이 있고 우지(氏)의 명을 따서 무슨무슨 베(部)라 하였다. 우지가미와 우지비토는 그 가문과 종사하는 일에 따라 오미 (臣) 무라지(連) 기미 (君, 公) 아타이(直) 오비토(首) 등의 가바네(姓)을 하사 받고 그 지위와 일은 세습되었다. 이와 같은 우지(氏)의 조직을 기초로 하고 가바네에 의해 서열화된 신분 질서를 씨성(氏姓) 제도라 한다. (37쪽)
* 우리는 성씨에 대한 어떤 기원을 얘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일본의 저 성씨가 족보가 없다고 비하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저들의 성씨가 족보없는 것이란 얘기를 곧잘 듣곤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씨가 무엇일까 싶다. (양반이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성씨의 기원에 대한 이 얘기는 나에게는 새롭다. 김수로왕이 슬퍼하겠지만. 그이는 나의 조상이긴 했을까?
** 야마토가 '정권'이었는지는 나의 시각에서는 의문이다, 일본의 역사기술에서 '정치수준과 등급'을 상향시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튼 자주적인 국체임을 과시하는 것이야 어쩌지 못하겠지만. 이 시기에 이 정도의 조직과 체제를 생각했다면 이상하리만치 앞서 있는 나라인 셈이다. 윤색과 가필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이후 646년 大化の改新의 조(詔) 역시 마찬가지다. 공지 공민과 반전수수제라든가, 지방관의 임명, 호적 계장의 도입, 국가의 통일적 지배 등. 이 정도면 일본은 당시 세계 최고의 국가체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서구의 혹은 시민적 시각으로 국가의 과거를 재해석한다는 것은 주의해서 받아들일 일이다. 720년 편찬되었다는 일본서기의 기술이 그 이후 메이지 시대 재해석되거나 재평가된 점도 윤색의 의심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남 얘기보다 우리 얘기가 더 급하긴 하지만.)
*** 반전수수제(班田收授制) 역시 과연 그 당시에 일시적으로 그러한 제도가 당나라의 균전제(均田制) 영향으로 시행했다고는 하고, 신라 역시 722년(신라 성덕왕 21년)에 정전(丁田)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이후의 장원(지방 토호의 농지 사적 소유) 등을 생각해 보면 용어상이거나 부분적 정전이거나 균전일 가능성이 높다. 한정적 의미에서의 균전(均田)일 것이다.
****일본은 '성'과 '씨'를 전통적으로 구분했었는데, '성'으로는 집안의 유래와 벼슬 정도를 나타내고 '씨'로는 호주제(戶主制)의 가족 구성을 나타낸다. 성은 유력 호족들에 의해 세습됐으며 흔히 봉건 사회의 작위(爵位)에 해당하는 명예적 측면과 실제 직급의 역할을 나타내는 측면 두 가지 성격을 모두 띠고 있었다...메이지정부(明治政府)는 1870년의 평민묘자허용령(平民苗字許容令), 1872년 임신년호적법(壬申戸籍法)에 따라 성과 씨의 2단 체계를 일원화하였고, 종래의 성과 씨 두 가지를 병기하는 관습을 폐지했다. 임신년 호적법 제정 이후 종래의 성(姓)은 종래의 씨(氏)와 함께 법적으로 일원화되어 현재는 성(姓)=씨(氏)=묘자(苗字)=명자(名字)가 모두 같은 지위를 갖게 됐다. 새로운 씨성제도가 일본 전국적으로 확립된 것은 1875년 평민묘자필칭의무령(平民苗字必称義務令)이 반포된 후였다. (위키백과에서).
****저자 연민수씨는 임나일본부의 해석에 있어 나의 해석과는 달리한다. 나로서는 임나 일본부가 대마도에 있었거나 했던 것으로 이해한다. 일본서기 한자의 뜻으로부터. 설사 가야 땅에 있었더라도 무슨 한반도 출장소로 봐야할 것이다. 철기문명의 수입 필요성 때문에. 여튼 그런 이유로 이 서책을 꼼꼼히 읽는 데는 꺼려짐이 있다.
나로서는 이런 씨성에서부터 일본 근대화의 한 기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메이지 이후 서양식의 풍습과 의식을 이식시킨 이들에게 사무라이의 계약적 문화이거나 영주 개념이거나에서부터에서도. 그래서 그게 혁명일 것이다. 사소한 것이 아닌 사소한 것을 바꾸어낸 이들. 그게 과거의 일본을 만든 힘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과거는 길어야 100년을 겨우 지속시킬 뿐이다.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호와 소음 - 인쇄술과 인터넷 정보의 과부하 속에서도, 객관적 진리의 양은 상대적으로 일정하다 (3) | 2024.11.05 |
---|---|
필경사 바틀비 - I would prefer not to 선택할 수 없는 자의 선택 (5) | 2024.11.05 |
중세문화이야기, 존 볼드윈 지음, 박은구, 이영재 옮김 -고딕, 신의 집을 짓는 지상원리, 적정비와 아름다움 그리고 신적 빛과 조명 (0) | 2023.07.04 |
코젤렉 개념사 사전 20 헌법, 국민은 헌법 상위에 헌법제정 권력으로 존재한다. (2) | 2023.06.05 |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페르디난트 자입트- 자발적 빈곤을 통한 천국으로의 길 (0) | 2023.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