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28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2) - 없애지 못하는 것, 더불어 굴복시키는 것

현장본에서는 첫머리에 몇 구절이 더 있다. 時,諸苾芻來詣佛所,到已頂禮世尊雙足,右遶三匝,退坐一面。 具壽善現亦於如是眾會中坐。 공경의 예를 표하는 구절과 수보리 역시 그 청중 속에 묻혀 있었다는 대목이다. 금강경의 질문이다.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어떻게 머물것인가,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 굴복시킬 것인가가 그렇다. 현장의 직역본에는 하나의 질문이 추가되어 있다. 응운하주? 운하수행? 운하섭복기심? 應云何住?云何修行?云何攝伏其心? 나의 관심이 그것이다.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Practicise! 현상의 것을 없다고 할 수 없다. 없앨 수도 없다. 거칠게 보면 탐진치 삼독은 현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질문이다. 금강경의 ..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 나는 인연을 보지 못한다

금강이 벼락의 번역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해서 현장의 번역에는 능단能斷이 경의 제목에 올라있다. 대개는 반야바라밀의 속성으로 금강을 이해하고 있는 격의(格義)를 보인다. 금강도 깨부수는 벼락의 지혜인가 아니면 금강같은 지혜인가, 시작부터 漢文이 가지고 있는 다의성, 혹은 모호성에 지친다. 언어에 앞서는, 혹은 넘어서는 수행을 통하면 이런 질문은 망상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릇 모든 인간의 지적 체계는 정의로부터 시작하는 법이므로. 3세에 논어를 읽었다는 중국식의 과장법이 문자해독을 뜻하지는 않을 터이지만, 515년경에 양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는 금강경을 32분으로 나누어 분제(分題)를 매긴다. 첫 나눔문단의 제목이 법회가 열린 말미앎음이다. 인연이라면. 그러나 나는 구마라집의 판본에서 인연을..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0)

부처님의 말씀이 그렇게 어려울 리가 없다. 그분의 생몰 연대가 얼추 BC (이 기준을 쓸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지만) 500년 경이고 비슷한 시기에 공자-옛 조선과 오늘에도 여전한 해악을 생각할 때 "님"자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라는 사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타고라스"님"도 비슷한 시기의 사람들이다. 이런 생몰연대를 언급하는 이유는 당시의 인류의 사상의 수준을 가늠해보고자 함이다. 언어가 현상을 반영할 뿐, 창조하지는 않았을 시절이었을 것이기에. 다시 금강경으로 돌아가면 금강경의 저술 연대는 BC 150년 경으로 부처님 사후 350년-단순히 500년이라 보는 것이 속이 편할 수도 있다-이후이다. 여시아문, '내가 이렇게 들었다'라고 어린 아이같은 유치한 언술을 첫머리에 두었어도 그 들었던 내용..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톺아 읽기 (1)

觀自在菩薩 行 深 般若波羅蜜多 時 照見 五蘊 皆 空 度 一切苦厄, 舍利子 色 不異 空 空 不異 色 色 卽 是空 空 卽 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受不異 空 空不異 受 想不異 空 空不異想 行不異空 空 不異行 識不異空 空不異識) 舍利子 是 諸法 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 中 無 色 無 受想行識 空 中 無 眼耳鼻舌身意 無 色聲香味觸法 無 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耳界 無鼻界 無舌界 無身界) 無 老死 亦無 老死盡 無 無明 亦無 無明 盡 乃至 無 苦集滅道 無(無明 行 識 名色 六處 觸受 愛 取 有 生 老 死) 盡 無 智 亦 無 得 以 無所得 故 菩提薩埵 依 般若波羅蜜多 故 心 無罣礙 無罣 礙 故 無有恐怖 遠離 - 究竟 顚倒夢想 - 涅槃 三世諸佛 依 般若波羅蜜多 故 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 知 般若波羅蜜..

열 가지 현묘한 말씀 十玄談 중에서 - 색을 지나쳤으면 다시 색의 자리로 돌아가지 마라!

鷺鷥立雪非同色 해오라기 눈밭에 서있어도 같은 빛이 아니며 明月蘆花不似他 환한 달빛 아래 갈대꽃도 서로 닮고자하지 않는다 당의 선승(禪僧) 동안상찰(同安常察)의 십현담에 실려있는 글귀이다. 나는 임제종풍 제 16장 황룡삼관에서 다시 읽는다. 언어나 관념을 벗어나야 참으로 제대로의 빛을 볼 수 있고 우리가 희다라고 말하는 그 빛은 존재하는 실체가 아닌 것이다. 이 십현담의 시제가 일색과후一色過後 색을 지나친 후 다시 색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찌 색이 있던 줄을 알겠는가!

아함경 - 술은 게으름의 원인이며 지혜의 힘이 약해지는 과오가 생긴다

아함경, 돈연 옮김, 민족사 교계 싱갈라 경 탐욕에 이끌려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 노여움에 이끌려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 어리석음에 이끌려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 그리고 겁에 질려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악을 행하기 쉽다. - 탐진치가 3독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 더불어 겁(두려움)까지가 악을 행하기 쉽다라는 설명은 내게 처음이다. 게으름의 원인이 되는 술과 같은 것에 빠져 지내는 일은 재산을 잃게 되는 문이다. 아무런 일도 없이 때 아닌 때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재산을 잃게 되는 문이다. 구경거리나 도박 따위에 빠져서, 나쁜 벗과의 교제에 빠져서, 나태함에 빠져서 지내는 일 역시 재산을 잃게 되는 문이다. ... 술은 게으름의 원인이 되는 것이니, 술과 같은 것에 빠져 지내면 다음과 같..

임제종풍, 지소화상 찬, 정석태 역 - 그 당시 그 가르침을 내리신 곳에서 살펴보라

임제종풍, 지소화상 찬, 정석태 역 제1장, 사료간 임제의 문인이던 극부가 또 묻기를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은 것입니까?라고 하자,임제선사가 말하기를 "임금은 보전에 오르고, 촌로는 태평가를 부른다오."라고 하였다. (25쪽) 중국인들의 문답법은 괴이롭다. 질문이 있으되 대답은 저만큼 떨어져있다. 아니 오히려 더 뒤통수를 내리치듯 언어의 벽을 건너뛰어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럴리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그러나 이해하기 전에 움직이라는 큰 뜻은 변함이 없다. 정적인 이해에 동적인 묘사의 어법일지도 모른다. 중국인의 문답법은.다시 위 질문에 대한 답변들을 읽어본다. 남원혜옹이 또 묻기를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모두 없애지 않은 것인가?[ 如何是人境俱不奪]"라고..

금강경 한 구절......아닐 비(非)의 해석과 관련하여

금강경을 읽으며 시종 궁금했던 것은, 부처님 당시 혹은 세후 500년 이후의 결집시기에도, 언어의 수준이란 문화나 문명의 수준에 근거한다는 점일진데, 요즈음의 문명언어로 이해할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었다. 한자 아닐 비(非)의 상형은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있는 형상이다. (혹은 새가 날개짓으로 떠나는 형상이다.) '아니다'라는 것은 뜻이 격의된 것으로 보여지고, 종래의 뜻은 떠나다, 여의다, 등지다, 돌아서다 정도일 것이다. 또한 동사(動詞)로 해석해 봄 직하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몸의 형상(身相)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이런 상을 깨닫고, 그 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여래를 깨닫는 것이다. 필멸의 존재로서 인간형상을 잘 보고, 그 필멸의 허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