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28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2) - 옛 사람의 향기와 함께하는 방법

若是經典所在之處 卽爲有佛 若尊重弟子 경전을 두루 읽고 (실천으로) 수행하는 것이 옛 사람의 향기와 함께하는 방법이다. 하물며 그 제자까지 함께 함에랴! 현장본은 此地方所,大師所住,或隨一一尊重處所,若諸有智同梵行者。說是語已。 여기서는 옛사람이 아니라 경이 설해지는 장소에 현재의 큰 스승과 수행 도반이 함께한다는 뉘앙스이다. on that piece of ground the Teacher himself dwells, or one or another of his venerable lieutenants. 나는 언연중에 佛이란 글자에 묶이어 옛사람의 향기로 옮긴 것은 아닌가, 현장 본을 보며 다시 생각한다. 佛의 현재성과 상시성을.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1) - 인연으로부터 말미암은

於此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구마라집 역본에는 이 구절이 없지만 (19장 法界通化分에서 나오긴 한다.) 於此法門乃至四句伽陀,受持、讀誦、究竟通利,及廣為他宣說、 開示、如理作意,由此因緣所生福聚,甚多於前無量無數。 현장본의 이 구절은 아름답다. 由此因緣 인연으로부터 말미암은. 영어 번역은 밋밋하다, on that basis. 어쩌면 그것은 밑바닥에 깔고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연이란 것은. 11장에는 불교의 숫자개념이 나온다. 아르키메데스가 BC 250년경 모래알을 세는 사람이라는 논문으로 우주에 모래를 채운다는 계산을 했다지만, 佛告善現:於汝意云何,乃至殑伽河中所有沙數,假使有如是沙等殑伽河, 是諸殑伽河沙寧為多不? 善現答言:甚多,世尊!甚多,善逝!諸殑伽河尚多無數,何況其沙! 갠지스강의 모래알의..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0) - 相에도 非相에 조차도 물들지 말라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 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For that reason, then, Subhuti, a bodhisattva should conceive an aspiration in such a way that it is unfixed. He should not conceive an aspiration which is fixed in form, he should not conceive an aspiration which is fixed in sounds, smells, tastes, objects of touch, or dharmas, he should not conceive an aspiration which is fixed in anything ..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9) - 무엇을 여읠 것인가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바, 여의다의 의미는 (사랑하는) 무엇을 멀리 떠나 보내는 것이다. 한자 離가 처음 등장하는 대목이다.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不. 만약 아라한이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감히 뜻을 품겠는가 卽爲着我人衆生壽者 (그런뜻을 품는다면) 곧 그것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무는(집착하는, 구하는) 것이다.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 第一 是 第一離欲阿羅漢. 무쟁 삼매를 얻은 사람 중에 최고로 꼽는 것은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니라. 상을 여의고 (14장, 離相寂滅), 색을 여의어야(20장, 離色離相分), 진실의 문턱을 넘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여의어 잃어야 할 것들은 늘 사랑하는 것들이다. 현장은 다음과 같이 옮긴다. 我得 阿羅漢 永離貪欲 者,如來 不應 記說 我言:善男子得無諍住 最為..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8) 경으로부터 나오는 부처님

8장의 논리구조를 살펴보기 위해 수사를 걷어내고 핵심만을 추려보자. 若人滿 七寶 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 寧爲多 不. 甚多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 福德多. 何以故 一切諸佛 及 諸佛法 皆從此經出.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우리말로 옮겨보면, 칠보로 세상을 채우는 보시의 복덕은 큰가? 크다. 왜냐하면 복덕이란 곧 복덕의 본연이 아니기에 이를 이유로 복덕이 많다고 한다. 왜 그런가 모든 부처님과 불법이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부처님 법이란 곧 부처님 법이 아니다. 연결이 되지 않는 설명이다. 8장 이후가 대부분 이런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 앞 두줄은 이해될 법하다. 그러나 갑자기 세번째 줄은 비약이다. 네번 째줄은 세번 째 줄의 부처님법에 대해서 다시 즉비 구문으로 대답..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7)- 큰 법의 한 조각에서라도 머물지마라.

구마라집 금강경에 定法이란 말은 단 한 번 나온다. '법'이란 말은 참 어렵다. 존재이기도, 무언가를 구성하는 세부요소이기도 하고, 고정된 무엇이기도 하다. 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邈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可說 비슷한 구절이 22장에서 少法으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다. 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乃至 無有少法可得 是名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 구절을 현장은 少法으로 옮긴다. 대신 定法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如我解佛所說義者,無有少法如來、應、正等覺 證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無有少法 어떻게 보면 문장의 앞에서 언급한 法을 받아 그 법 자체의 적은 한 부분(조각)으로 정의되는 방식으로서의 少法으로 이해된다. (설문해자 등에서의 한자 少의 자형 역시 부수어진 조각으로 표현된다.) 여타의 구절도 현장의 번역에서는 유사..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6) - 뗏목, 노동의 산물을 버릴것인가?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강을 건너 저 언덕으로 가고자 들자면 건넌 후의 뗏목이란 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얻게될 지적 산물이 무엇이든 노동의 산물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나는. 지적인 것을 얻는데도 노동이 소요된다. 그것이 사물의 아름다움이다. 그런 땀과 근력이 모여 만든 단순한 것은 늘 아름다움을 준다, 저 언덕에 도달하지 않아도. 가보아야 안다면 그것은 가보지 않아 알 수 없는 무엇과 무엇이 다른가? 때론 노동의 경험이 그런 가보지 않은 언덕에 대해 더 이르게 알려줄 수도 있다. 그것이 힘이다. 눈이다. 노동이 갖춘 장엄한 지혜이다. 현장은 이렇게 옮긴다. 是故如來密意而說筏喻法門。諸有智者,法尚應斷,何況非法 한 쪽은 늘 하던 이야기인데 반해, 한 쪽은 비밀스런..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5)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

진리를 보는 방법은 이렇다. 若見諸相 非相 일체의 상이 상이 아님을 보는 것이다. (제상이 비상임을 보는 것이다.) 혹은 만약 제상을 보게된다면 이는 비상이다. (비상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구마라집의 역이다. 현장의 번역은 이렇다. 以相非相 상과 상이 아님을 가지고써 (한글 능단금강경) 혹은 상이 상 아님으로써. 뉘앙스가 조금 다르지 아니한가. 어느 경우에도 그것은 불변고정한다는 관념과 비상(연기와 공으로서의 인식)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보아야 하는가는 여전한 의문이다. 굳이.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 보기로 작정하였다면야 이런 질문이 우문일 수 있겠지만.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4) - 머문 바 없는 마음으로 연습하라

菩薩 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나는 못내 궁금하다. 무소주無所住의 마음 공부인가 혹은 행어보시行於布施의수행인가? 나는 후자에 방점을 가져간다. 물론이지, 보시가 당연하다면 그 보시는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부터의 것이야 한다. 공자는 배우고 때로 익히라(習)고 했지만 우리는 늘 배움에 방점을 찍는 편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갈구하고 것에 대한 연습(meletē)을 말했지만 나는 늘 좋아하는 것에 대한 공부를 먼저 생각한다. 연습으로 끌고가기에는 뒷심이 부족하다. 늘상 필요한 것은 이 뒷심인데도 말이다. 그러난 금강경의 두번째 질문을 상기하자. 云何修行? 현장본에 나오는. 맑스의 표현따나 인간의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라는 마음, 아공 我空을 넘어서, 머문 바 없는 마음으로 ..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3) - 마음이 머무는 자리

질문의 답은 간결하다.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이기에 滅度 無量無數無邊 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되어야 한다는 것. 소위 즉비의 구문이 처음 등장한다. 만약~이 어찌어찌한다면 곧 ~이 아니다. 다른 구절에서는 卽非~性 까지 포함된 구절이 하나 있다. 본연의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뒤쪽의 구절을 미리 끌어오자면 위 구절은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性) 是名菩薩 이다. 세 번의 보살이 각가 등장한다. 첫 보살이 일반적인 현상으로서의 보살일 터이고, 두 번째의 보살이 본연으로서의 보살자체-자체가 공하다는 것이고보면 그 마저도 맞지 않을 터지만-일 것이며, 그런고로 세 번째의 보살은 관념상, 언어상의 보살일 것이다. 이런 논리구조와는 별개로 답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