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18

안상학 시인의 아배 생각

아배 생각 /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야야, 어디 가노? - 예……. 바람 좀 쐬려고요. -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 ..

죽란시첩 - 서늘한 초가을 서지(西池)에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 번 모이고

다산이 젊었을 적이었다고 한다. 명례동인가 어딘가에서 한창 젊음과 자신감의 패기가 넘쳐났을 적, 뜻이 맞는 벗들과 함께 계를 만든 모양인데....다산의 정원에 대나무를 두르고서 죽란(竹欄)이라 불렀더랬다. 시사(詩社)라는 것은 시를 쓰는 계 (시계詩契, 혹은 수계修契)의 다른 이름인데, 이른바 계꾼들 사이에 규약을 만들었으니, 시대의 한계 속에서도 생의 여유로움을 구가했던가? 그들의 규약에서 묻어나는 젊음의 절정은 부럽기만 하다. 죽란시사첩 서문 (竹欄詩社帖 序文)/정약용 위아래로 5000년이나 되는 시간 속에서 하필이면 함께 태어나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가로세로 33만 리나 되는 넓은 땅 위에서 하필이면 함께 태어나 한 나라에서 같이 살아간다는 것도 결코 우연..

김태정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김태정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가을 저녁이 아름다운 절, 그래서 '미황사'일지는 오직 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달마산 미황사를 두고 김태정 시인이 길어올린 싯구는 녹녹치 않은 세월과 시절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하기야 나 역시도 하루 두 세번 지나는 완행 버스를 타고 미황사를 다녀온 적이 있거니와, 그 가을 저녁의 스산함이 묻어나는 들녁을 지나 달마산 중턱에 위의를 갖춘 미황사는 반야용선의 자태를 잃지 않고 빛나고 있던 터였습니다. 어린 딸내미에게 구멍가게에서 딱딱한 얼음과자를 하나 입에 물려주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항상 거리를 속여야 했던 여행길. 기차와 버스를 갈아 타고 다니던 지난 날의 기억,미황사의 가을 저녁을 보러 가는 길이었더랬습니다. 이제 김태정 시인의 미황사는 내가 미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