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뜨는 달 오랫동안 잊고있던 한 사람을, 추억한다. 아현동 굴레방 다리 밑을 지나며, 백자빛 무릎연적같은 엉덩이를 까고 소피를 보던 아이. 스물 하나의 풀빛은 저만큼 가고, 마흔 여덟의 사내는 남았다. 젖꼭지 같이, 깡총한 저고리를 비집고 나온 젖꼭지 같은. 나는, 맑았던 눈으로 그 한 사람이 ..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012.08.10
바다가 보이지 않았던 교실 루핑이 낡은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건물은 석탄 창고였는지 구공탄 공장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벽면에는 검정이 훌훌하여 동무들과 뛰놀다 옷을 버리기 일쑤였다. 그 학교는 내 기억이 맞다면 바다가 보이는 교실의 전신이었다. 정일근 시인의 시작품은 산중턱에 자리잡은, 새로지..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012.08.10
소식 소식 저 바닷물의 출렁임에 기대어 나도 몸을 싣습니다. 조금씩 쓸려왔다 꼭 그 만큼 쓸려가는 누군가의 편지글에 잊었던 상처 아리거나 혹은 쪽지 하나 없어도 그만일 빈 병 마냥 그대 눈길에 서늘해지는 내 가슴도 저리 쓸어내리는 새벽바다,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가랭이까지 젖어도..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010.05.11
술국 술국 자박 자박 철둑 길 간다 - 술국 한 주전자 사 오너라 개똥 옆에서도 쇠뜨기 풀 자락 성성하고 비름 풀 오도독 먹빛 퍼덕이는 밤 길 토악질 눌러붙은 침목을 하나 둘 밟아 주전자 가득 가락국수 국물 철벙이며 경화 반점 중국집 다녀오던 길 큰 곰 작은 곰 술국자 같은 별을 헤면서 예전의 걸음으로 ..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010.05.10
쇠불알 쇠불알 외할메는 함지박에 든 쇠불알을 집어 들고선 흥정을 했다. 마수걸이는 지루해지기 마련이어서 빼빼마른 손자는 곁에서 하냥 쳐다만 보다 참새잽이 사냥꾼을 기다렸다. 자주 골골 거리던 외손자는 곧잘 감기를 앓았고, 막소금에 누런 똥물끼 빠져나간 힘빠진 소좆은 무쇠솥에 뽀얀 곰으로 삭고 ..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010.05.10
정월 보름 정월 보름 잠시 잦아든 바람에 새벽안개 사이로 물줄기를 헤쳐 가던 풍경의 붕어는 절집 네 귀퉁이를 돌아 결국 제 자리에 지친 지느러미를 내린다. 일렁일렁 촛불이 타는 새벽, 정한 바위 골라 용왕 먹이실 어머니, 두 눈동자도 밤새 깨어 있을 것이다. 잰걸음으로 떠났보낸 열 나흘의 달, 고쳐 새로이 ..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010.05.04
산수유, 기슭을 오르다 산수유, 기슭을 오르다 저 밭뙈기도 올해가 끝이다 사람들 발길 이어져 길이 되어, 하나 둘 집이 되어 버리면 늙은 아내와 심어둔 쪽파도 얼갈이도 봄날이 채 여물기 전에 거두어야 한다 노랗게 노랗게 하늘 가리도록 다리 불편한 노인처럼 산수유, 기슭을 오른다.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010.05.04
선암사 가는 길 선암사 가는 길 여섯 꽃잎을 모아 입술 짙은 꽃이 되었다던 옛 얘기 푸른 한 잎은 산문[山門]에 걸렸네 조계[曹溪], 조계, 귓속 맑은 조계야 잔 물 소리 발에 앵기네 산 속에 길 있어 길 위에 그리운 이 있어 산길 끝나는 곳, 풍경[風磬] 소리 잊히랴 살 냄새가 잊히랴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010.05.04
아버지의 지갑 아버지의 지갑 낡은 비닐 지갑 위로 등가죽 늘어진 악어 한 마리 항상 두 장의 주택 복권엔 삼각 지붕 아파트의 꿈 뭉실 뭉실 구름 퍼지면 슬레이트 지붕 푸른 빛으로 낮게 멍든 그, 가슴을 오늘은 지하철 계단참에 벌려진 나이롱 지갑 본다 산수가 되지 않으셨던 설사 셈이 밝으셨다 해도 손가락 셈 만..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010.04.22
안상학 시인의 아배 생각 아배 생각 /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009.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