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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6) - 뗏목, 노동의 산물을 버릴것인가?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강을 건너 저 언덕으로 가고자 들자면 건넌 후의 뗏목이란 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얻게될 지적 산물이 무엇이든 노동의 산물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나는. 지적인 것을 얻는데도 노동이 소요된다. 그것이 사물의 아름다움이다. 그런 땀과 근력이 모여 만든 단순한 것은 늘 아름다움을 준다, 저 언덕에 도달하지 않아도. 가보아야 안다면 그것은 가보지 않아 알 수 없는 무엇과 무엇이 다른가? 때론 노동의 경험이 그런 가보지 않은 언덕에 대해 더 이르게 알려줄 수도 있다. 그것이 힘이다. 눈이다. 노동이 갖춘 장엄한 지혜이다. 현장은 이렇게 옮긴다. 是故如來密意而說筏喻法門。諸有智者,法尚應斷,何況非法 한 쪽은 늘 하던 이야기인데 반해, 한 쪽은 비밀스런..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5)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

진리를 보는 방법은 이렇다. 若見諸相 非相 일체의 상이 상이 아님을 보는 것이다. (제상이 비상임을 보는 것이다.) 혹은 만약 제상을 보게된다면 이는 비상이다. (비상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구마라집의 역이다. 현장의 번역은 이렇다. 以相非相 상과 상이 아님을 가지고써 (한글 능단금강경) 혹은 상이 상 아님으로써. 뉘앙스가 조금 다르지 아니한가. 어느 경우에도 그것은 불변고정한다는 관념과 비상(연기와 공으로서의 인식)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보아야 하는가는 여전한 의문이다. 굳이.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 보기로 작정하였다면야 이런 질문이 우문일 수 있겠지만.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4) - 머문 바 없는 마음으로 연습하라

菩薩 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나는 못내 궁금하다. 무소주無所住의 마음 공부인가 혹은 행어보시行於布施의수행인가? 나는 후자에 방점을 가져간다. 물론이지, 보시가 당연하다면 그 보시는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부터의 것이야 한다. 공자는 배우고 때로 익히라(習)고 했지만 우리는 늘 배움에 방점을 찍는 편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갈구하고 것에 대한 연습(meletē)을 말했지만 나는 늘 좋아하는 것에 대한 공부를 먼저 생각한다. 연습으로 끌고가기에는 뒷심이 부족하다. 늘상 필요한 것은 이 뒷심인데도 말이다. 그러난 금강경의 두번째 질문을 상기하자. 云何修行? 현장본에 나오는. 맑스의 표현따나 인간의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라는 마음, 아공 我空을 넘어서, 머문 바 없는 마음으로 ..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3) - 마음이 머무는 자리

질문의 답은 간결하다.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이기에 滅度 無量無數無邊 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되어야 한다는 것. 소위 즉비의 구문이 처음 등장한다. 만약~이 어찌어찌한다면 곧 ~이 아니다. 다른 구절에서는 卽非~性 까지 포함된 구절이 하나 있다. 본연의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뒤쪽의 구절을 미리 끌어오자면 위 구절은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性) 是名菩薩 이다. 세 번의 보살이 각가 등장한다. 첫 보살이 일반적인 현상으로서의 보살일 터이고, 두 번째의 보살이 본연으로서의 보살자체-자체가 공하다는 것이고보면 그 마저도 맞지 않을 터지만-일 것이며, 그런고로 세 번째의 보살은 관념상, 언어상의 보살일 것이다. 이런 논리구조와는 별개로 답변은 ..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2) - 없애지 못하는 것, 더불어 굴복시키는 것

현장본에서는 첫머리에 몇 구절이 더 있다. 時,諸苾芻來詣佛所,到已頂禮世尊雙足,右遶三匝,退坐一面。 具壽善現亦於如是眾會中坐。 공경의 예를 표하는 구절과 수보리 역시 그 청중 속에 묻혀 있었다는 대목이다. 금강경의 질문이다.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어떻게 머물것인가,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 굴복시킬 것인가가 그렇다. 현장의 직역본에는 하나의 질문이 추가되어 있다. 응운하주? 운하수행? 운하섭복기심? 應云何住?云何修行?云何攝伏其心? 나의 관심이 그것이다.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Practicise! 현상의 것을 없다고 할 수 없다. 없앨 수도 없다. 거칠게 보면 탐진치 삼독은 현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질문이다. 금강경의 ..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 나는 인연을 보지 못한다

금강이 벼락의 번역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해서 현장의 번역에는 능단能斷이 경의 제목에 올라있다. 대개는 반야바라밀의 속성으로 금강을 이해하고 있는 격의(格義)를 보인다. 금강도 깨부수는 벼락의 지혜인가 아니면 금강같은 지혜인가, 시작부터 漢文이 가지고 있는 다의성, 혹은 모호성에 지친다. 언어에 앞서는, 혹은 넘어서는 수행을 통하면 이런 질문은 망상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릇 모든 인간의 지적 체계는 정의로부터 시작하는 법이므로. 3세에 논어를 읽었다는 중국식의 과장법이 문자해독을 뜻하지는 않을 터이지만, 515년경에 양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는 금강경을 32분으로 나누어 분제(分題)를 매긴다. 첫 나눔문단의 제목이 법회가 열린 말미앎음이다. 인연이라면. 그러나 나는 구마라집의 판본에서 인연을..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0)

부처님의 말씀이 그렇게 어려울 리가 없다. 그분의 생몰 연대가 얼추 BC (이 기준을 쓸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지만) 500년 경이고 비슷한 시기에 공자-옛 조선과 오늘에도 여전한 해악을 생각할 때 "님"자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라는 사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타고라스"님"도 비슷한 시기의 사람들이다. 이런 생몰연대를 언급하는 이유는 당시의 인류의 사상의 수준을 가늠해보고자 함이다. 언어가 현상을 반영할 뿐, 창조하지는 않았을 시절이었을 것이기에. 다시 금강경으로 돌아가면 금강경의 저술 연대는 BC 150년 경으로 부처님 사후 350년-단순히 500년이라 보는 것이 속이 편할 수도 있다-이후이다. 여시아문, '내가 이렇게 들었다'라고 어린 아이같은 유치한 언술을 첫머리에 두었어도 그 들었던 내용..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톺아 읽기 (1)

觀自在菩薩 行 深 般若波羅蜜多 時 照見 五蘊 皆 空 度 一切苦厄, 舍利子 色 不異 空 空 不異 色 色 卽 是空 空 卽 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受不異 空 空不異 受 想不異 空 空不異想 行不異空 空 不異行 識不異空 空不異識) 舍利子 是 諸法 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 中 無 色 無 受想行識 空 中 無 眼耳鼻舌身意 無 色聲香味觸法 無 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耳界 無鼻界 無舌界 無身界) 無 老死 亦無 老死盡 無 無明 亦無 無明 盡 乃至 無 苦集滅道 無(無明 行 識 名色 六處 觸受 愛 取 有 生 老 死) 盡 無 智 亦 無 得 以 無所得 故 菩提薩埵 依 般若波羅蜜多 故 心 無罣礙 無罣 礙 故 無有恐怖 遠離 - 究竟 顚倒夢想 - 涅槃 三世諸佛 依 般若波羅蜜多 故 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 知 般若波羅蜜..

방글라데시 남쪽 끝 Kua Kata의 절집 구경 (1)

방글라데시의 다카에서 물경 10시간 이상 걸리는 이 곳, Patuakali의 남쪽 끝단 Kuakata입니다. 절집이 있다기에 참새 방앗간 마냥 둘러봅니다. 본당은 가려면 신발을 벗고 가야 합니다. 멋모르고 성큼성큼 나섰다가 한 소리 듣고는 다시 돌아와 신발을 벗어둡니다. 세속의 티끌과 경내의 경계가 뚜렷해지는 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네 절집처럼 누군가 비를 들고 절집 마당을 치운 듯한 모양새는 아닙니다. 그저 무슬림 식의 종교 예절의 하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당, 부처님을 모셨기에 대웅전으로 불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만, 입구에는 아라한 한 분이 서 계십니다. 훤칠한 키에 부채를 들고 다른 손에는 염주와 지팡이가 있습니다. 이름판에는 Shivali Arahan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인물님은 한 인..

방글라데시 남쪽 끝 Kua Kata의 절집 구경 (2)

방글라데시의 남단 마을 Kua Kuta를 다녀옵니다. 일전에 절집을 둘러 보았다지만 절집 뒤편의 신목(神木)을, 그것이 중국식의 용수(龍樹)도 아니고 보리수 나무일지는 불분명합니다, 보지 못한 터라 이 참에 제대로 보기로 합니다. 잎새의 모양은 인도 보리수와 비슷해보입니다. 그저 믿고 봅니다. 이 마을에 정착한 250년전의 초기 Rakhain이주민들은 어업을 영위하는 것도 그렇지만 우물물부터 길어야 했을 것입니다. Kua가 바로 벵골어로 우물이란 뜻이고, Kata는 땅 혹은 땅을 파다는 뜻이라고 하니 우리 식으로는 샘골, 새미골에 해당합니다. 저 우물이 당초의 그 우물인지는 불분명합니다만, 200여년이 지난 것이라고 하니 그리 알아둘 밖에요. 지금은 우물터가 절집 경계 안쪽으로 들어와 입장료를 , 절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