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17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8) - 세상의 마음을 보는 방법

佛告. 須菩提 爾所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다. 세상의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니. 그 이유가 마음이 마음이 아니라 그 부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라는데. 과거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는데. 현장 본을 들춰본다. 佛言:善現!乃至 爾所 諸世界中 所有有情, 彼諸有情 各有種種,其心 流注 我悉能知。 何以故? 善現! 心流注 心流注者, 如來說非流注, 是故 如來說名心流注 心流注。 所以者何?善現!過去心不可得,未來心不可得,現在心不可得。 조금 뉘앙스를 달리한다. 구마라집의 번역이 정태적 static 상황이라면 현장의 번역은 동태적 d..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3) - 이름만을 기억하라

이제 즉비의 구문을 다시 쳐다본다. 구마라집 :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현 장 : 諸世界,如來說非世界,是故如來說名世界 티벳본 Tibetan 의 영어 직역은 ’jig rten gyi khams ga" lags pa de khams ma mchis par de b#in gßegs pas gsu"s te des na ’jig rten gyi khams #es bya’o. (= That which is a world system has been said to be systemless by the Tathågata, and thus it is called a world system.) 이들의 영어번역은 이렇다. Max Müller 1894: Sanskrit 번역 And what was preached by t..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4) - 어둠 속에서 빛을 보는 방법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如人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생각케하는 구절이다. 善現!譬如士夫入於暗室,都無所見,當知菩薩若墮於事,謂墮於事而行布施,亦復如是。 눈이 어두워 생각을 낼 수 없을 때 조차, 보살은 대상에 빠졌다는 것을 당연히 깨닫고 대상에 빠졌다고 말하고 보시를 행함도 이와 같이 (대상에 빠지면 빠짐을 알고 빠진대로) 해야하며, 善現!譬如明眼士夫,過夜曉已,日光出時,見種種色,當知菩薩不墮於事,謂不墮事而行布施,亦復如是。 눈 밝은 사람이 밤을 도와 새벽이 지나 태양이 솟아 오르면 개개의 색을 보게 되면, 보살은 대상에 빠지지 않음을 당연히 깨닫고 대상에 빠지지 않음을 말하고 보시를 행함도 이와 같이 (대상에 빠지지 않으면 빠지지 않음을 ..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2) - 옛 사람의 향기와 함께하는 방법

若是經典所在之處 卽爲有佛 若尊重弟子 경전을 두루 읽고 (실천으로) 수행하는 것이 옛 사람의 향기와 함께하는 방법이다. 하물며 그 제자까지 함께 함에랴! 현장본은 此地方所,大師所住,或隨一一尊重處所,若諸有智同梵行者。說是語已。 여기서는 옛사람이 아니라 경이 설해지는 장소에 현재의 큰 스승과 수행 도반이 함께한다는 뉘앙스이다. on that piece of ground the Teacher himself dwells, or one or another of his venerable lieutenants. 나는 언연중에 佛이란 글자에 묶이어 옛사람의 향기로 옮긴 것은 아닌가, 현장 본을 보며 다시 생각한다. 佛의 현재성과 상시성을.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1) - 인연으로부터 말미암은

於此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구마라집 역본에는 이 구절이 없지만 (19장 法界通化分에서 나오긴 한다.) 於此法門乃至四句伽陀,受持、讀誦、究竟通利,及廣為他宣說、 開示、如理作意,由此因緣所生福聚,甚多於前無量無數。 현장본의 이 구절은 아름답다. 由此因緣 인연으로부터 말미암은. 영어 번역은 밋밋하다, on that basis. 어쩌면 그것은 밑바닥에 깔고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연이란 것은. 11장에는 불교의 숫자개념이 나온다. 아르키메데스가 BC 250년경 모래알을 세는 사람이라는 논문으로 우주에 모래를 채운다는 계산을 했다지만, 佛告善現:於汝意云何,乃至殑伽河中所有沙數,假使有如是沙等殑伽河, 是諸殑伽河沙寧為多不? 善現答言:甚多,世尊!甚多,善逝!諸殑伽河尚多無數,何況其沙! 갠지스강의 모래알의..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0) - 相에도 非相에 조차도 물들지 말라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 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For that reason, then, Subhuti, a bodhisattva should conceive an aspiration in such a way that it is unfixed. He should not conceive an aspiration which is fixed in form, he should not conceive an aspiration which is fixed in sounds, smells, tastes, objects of touch, or dharmas, he should not conceive an aspiration which is fixed in anything ..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9) - 무엇을 여읠 것인가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바, 여의다의 의미는 (사랑하는) 무엇을 멀리 떠나 보내는 것이다. 한자 離가 처음 등장하는 대목이다.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不. 만약 아라한이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감히 뜻을 품겠는가 卽爲着我人衆生壽者 (그런뜻을 품는다면) 곧 그것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무는(집착하는, 구하는) 것이다.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 第一 是 第一離欲阿羅漢. 무쟁 삼매를 얻은 사람 중에 최고로 꼽는 것은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니라. 상을 여의고 (14장, 離相寂滅), 색을 여의어야(20장, 離色離相分), 진실의 문턱을 넘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여의어 잃어야 할 것들은 늘 사랑하는 것들이다. 현장은 다음과 같이 옮긴다. 我得 阿羅漢 永離貪欲 者,如來 不應 記說 我言:善男子得無諍住 最為..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8) 경으로부터 나오는 부처님

8장의 논리구조를 살펴보기 위해 수사를 걷어내고 핵심만을 추려보자. 若人滿 七寶 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 寧爲多 不. 甚多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 福德多. 何以故 一切諸佛 及 諸佛法 皆從此經出.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우리말로 옮겨보면, 칠보로 세상을 채우는 보시의 복덕은 큰가? 크다. 왜냐하면 복덕이란 곧 복덕의 본연이 아니기에 이를 이유로 복덕이 많다고 한다. 왜 그런가 모든 부처님과 불법이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부처님 법이란 곧 부처님 법이 아니다. 연결이 되지 않는 설명이다. 8장 이후가 대부분 이런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 앞 두줄은 이해될 법하다. 그러나 갑자기 세번째 줄은 비약이다. 네번 째줄은 세번 째 줄의 부처님법에 대해서 다시 즉비 구문으로 대답..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7)- 큰 법의 한 조각에서라도 머물지마라.

구마라집 금강경에 定法이란 말은 단 한 번 나온다. '법'이란 말은 참 어렵다. 존재이기도, 무언가를 구성하는 세부요소이기도 하고, 고정된 무엇이기도 하다. 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邈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可說 비슷한 구절이 22장에서 少法으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다. 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乃至 無有少法可得 是名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 구절을 현장은 少法으로 옮긴다. 대신 定法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如我解佛所說義者,無有少法如來、應、正等覺 證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無有少法 어떻게 보면 문장의 앞에서 언급한 法을 받아 그 법 자체의 적은 한 부분(조각)으로 정의되는 방식으로서의 少法으로 이해된다. (설문해자 등에서의 한자 少의 자형 역시 부수어진 조각으로 표현된다.) 여타의 구절도 현장의 번역에서는 유사..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6) - 뗏목, 노동의 산물을 버릴것인가?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강을 건너 저 언덕으로 가고자 들자면 건넌 후의 뗏목이란 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얻게될 지적 산물이 무엇이든 노동의 산물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나는. 지적인 것을 얻는데도 노동이 소요된다. 그것이 사물의 아름다움이다. 그런 땀과 근력이 모여 만든 단순한 것은 늘 아름다움을 준다, 저 언덕에 도달하지 않아도. 가보아야 안다면 그것은 가보지 않아 알 수 없는 무엇과 무엇이 다른가? 때론 노동의 경험이 그런 가보지 않은 언덕에 대해 더 이르게 알려줄 수도 있다. 그것이 힘이다. 눈이다. 노동이 갖춘 장엄한 지혜이다. 현장은 이렇게 옮긴다. 是故如來密意而說筏喻法門。諸有智者,法尚應斷,何況非法 한 쪽은 늘 하던 이야기인데 반해, 한 쪽은 비밀스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