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17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5)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

진리를 보는 방법은 이렇다. 若見諸相 非相 일체의 상이 상이 아님을 보는 것이다. (제상이 비상임을 보는 것이다.) 혹은 만약 제상을 보게된다면 이는 비상이다. (비상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구마라집의 역이다. 현장의 번역은 이렇다. 以相非相 상과 상이 아님을 가지고써 (한글 능단금강경) 혹은 상이 상 아님으로써. 뉘앙스가 조금 다르지 아니한가. 어느 경우에도 그것은 불변고정한다는 관념과 비상(연기와 공으로서의 인식)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보아야 하는가는 여전한 의문이다. 굳이.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 보기로 작정하였다면야 이런 질문이 우문일 수 있겠지만.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4) - 머문 바 없는 마음으로 연습하라

菩薩 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나는 못내 궁금하다. 무소주無所住의 마음 공부인가 혹은 행어보시行於布施의수행인가? 나는 후자에 방점을 가져간다. 물론이지, 보시가 당연하다면 그 보시는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부터의 것이야 한다. 공자는 배우고 때로 익히라(習)고 했지만 우리는 늘 배움에 방점을 찍는 편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갈구하고 것에 대한 연습(meletē)을 말했지만 나는 늘 좋아하는 것에 대한 공부를 먼저 생각한다. 연습으로 끌고가기에는 뒷심이 부족하다. 늘상 필요한 것은 이 뒷심인데도 말이다. 그러난 금강경의 두번째 질문을 상기하자. 云何修行? 현장본에 나오는. 맑스의 표현따나 인간의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라는 마음, 아공 我空을 넘어서, 머문 바 없는 마음으로 ..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3) - 마음이 머무는 자리

질문의 답은 간결하다.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이기에 滅度 無量無數無邊 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되어야 한다는 것. 소위 즉비의 구문이 처음 등장한다. 만약~이 어찌어찌한다면 곧 ~이 아니다. 다른 구절에서는 卽非~性 까지 포함된 구절이 하나 있다. 본연의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뒤쪽의 구절을 미리 끌어오자면 위 구절은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性) 是名菩薩 이다. 세 번의 보살이 각가 등장한다. 첫 보살이 일반적인 현상으로서의 보살일 터이고, 두 번째의 보살이 본연으로서의 보살자체-자체가 공하다는 것이고보면 그 마저도 맞지 않을 터지만-일 것이며, 그런고로 세 번째의 보살은 관념상, 언어상의 보살일 것이다. 이런 논리구조와는 별개로 답변은 ..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2) - 없애지 못하는 것, 더불어 굴복시키는 것

현장본에서는 첫머리에 몇 구절이 더 있다. 時,諸苾芻來詣佛所,到已頂禮世尊雙足,右遶三匝,退坐一面。 具壽善現亦於如是眾會中坐。 공경의 예를 표하는 구절과 수보리 역시 그 청중 속에 묻혀 있었다는 대목이다. 금강경의 질문이다.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어떻게 머물것인가,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 굴복시킬 것인가가 그렇다. 현장의 직역본에는 하나의 질문이 추가되어 있다. 응운하주? 운하수행? 운하섭복기심? 應云何住?云何修行?云何攝伏其心? 나의 관심이 그것이다.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Practicise! 현상의 것을 없다고 할 수 없다. 없앨 수도 없다. 거칠게 보면 탐진치 삼독은 현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질문이다. 금강경의 ..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1) 나는 인연을 보지 못한다

금강이 벼락의 번역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해서 현장의 번역에는 능단能斷이 경의 제목에 올라있다. 대개는 반야바라밀의 속성으로 금강을 이해하고 있는 격의(格義)를 보인다. 금강도 깨부수는 벼락의 지혜인가 아니면 금강같은 지혜인가, 시작부터 漢文이 가지고 있는 다의성, 혹은 모호성에 지친다. 언어에 앞서는, 혹은 넘어서는 수행을 통하면 이런 질문은 망상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릇 모든 인간의 지적 체계는 정의로부터 시작하는 법이므로. 3세에 논어를 읽었다는 중국식의 과장법이 문자해독을 뜻하지는 않을 터이지만, 515년경에 양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는 금강경을 32분으로 나누어 분제(分題)를 매긴다. 첫 나눔문단의 제목이 법회가 열린 말미앎음이다. 인연이라면. 그러나 나는 구마라집의 판본에서 인연을..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0)

부처님의 말씀이 그렇게 어려울 리가 없다. 그분의 생몰 연대가 얼추 BC (이 기준을 쓸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지만) 500년 경이고 비슷한 시기에 공자-옛 조선과 오늘에도 여전한 해악을 생각할 때 "님"자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라는 사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타고라스"님"도 비슷한 시기의 사람들이다. 이런 생몰연대를 언급하는 이유는 당시의 인류의 사상의 수준을 가늠해보고자 함이다. 언어가 현상을 반영할 뿐, 창조하지는 않았을 시절이었을 것이기에. 다시 금강경으로 돌아가면 금강경의 저술 연대는 BC 150년 경으로 부처님 사후 350년-단순히 500년이라 보는 것이 속이 편할 수도 있다-이후이다. 여시아문, '내가 이렇게 들었다'라고 어린 아이같은 유치한 언술을 첫머리에 두었어도 그 들었던 내용..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톺아 읽기 (1)

觀自在菩薩 行 深 般若波羅蜜多 時 照見 五蘊 皆 空 度 一切苦厄, 舍利子 色 不異 空 空 不異 色 色 卽 是空 空 卽 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受不異 空 空不異 受 想不異 空 空不異想 行不異空 空 不異行 識不異空 空不異識) 舍利子 是 諸法 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 中 無 色 無 受想行識 空 中 無 眼耳鼻舌身意 無 色聲香味觸法 無 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耳界 無鼻界 無舌界 無身界) 無 老死 亦無 老死盡 無 無明 亦無 無明 盡 乃至 無 苦集滅道 無(無明 行 識 名色 六處 觸受 愛 取 有 生 老 死) 盡 無 智 亦 無 得 以 無所得 故 菩提薩埵 依 般若波羅蜜多 故 心 無罣礙 無罣 礙 故 無有恐怖 遠離 - 究竟 顚倒夢想 - 涅槃 三世諸佛 依 般若波羅蜜多 故 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 知 般若波羅蜜..

페르낭 부르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 : 일상사는 반복되면서 구조가 된다.

페르낭 부르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 일상생활의 구조, 주경철 옮김, 까치 머릿말 경제학자들의 경우 경제를 하나의 동질적인 실체 one homogeneous reality로 보기 때문에 주변 배경으로부터 경제만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며, 또 수로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렇게 추출해낸 경제현상을 측정할 수 있고 또 측정해야 된다고 믿는다......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전산업화 preindustrial 시기의 발전이란 인류 역사를 둘로 갈라 놓는 산업혁명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점진적으로 시장,기업, 자본주의 적 투자라는 합리성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 그러나 다른 한편에 불투명한 영억이 ...시장 밑에 펼쳐져 있다. ...지표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 폭넓은 영역을..

참호에 갇힌 1차세계 대전 - 참호에 처박힌 아군과 적군은 둘 다 가엾은 존재들이었고 그게 사태의 본질이다.

참호에 갇힌 제1차 - 세계대전 트렌치코트에 낭만은 없었다, 존 엘리스, 정병선 역, 마티 1부 땅속의 일상 결국, 독일군은 단지 자신들이 머무러던 곳을 지키기 위해 땅을 팠다. 이 전선을 돌파할 수 없음을 이내 인식한 연합군도 마찬가지로 반영구적인 토루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최후의 결정적 돌파 작전을 개시하기 위한 출발선 이상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14쪽) (참호는) 그야 말로 진흙바다다. 심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응급치료소로 몸을 질질 끌고 가다가 빠져죽는다. 진흙이 가장 혹독한 시련이다. 흙이 들어간 탄약통과 라이플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병사들은 사격을 하려고 총에 오줌을 갈겼다. (63쪽) 다시 말해 사상자의 거의 절반이 참호의 끔찍한 조건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하는..

열 가지 현묘한 말씀 十玄談 중에서 - 색을 지나쳤으면 다시 색의 자리로 돌아가지 마라!

鷺鷥立雪非同色 해오라기 눈밭에 서있어도 같은 빛이 아니며 明月蘆花不似他 환한 달빛 아래 갈대꽃도 서로 닮고자하지 않는다 당의 선승(禪僧) 동안상찰(同安常察)의 십현담에 실려있는 글귀이다. 나는 임제종풍 제 16장 황룡삼관에서 다시 읽는다. 언어나 관념을 벗어나야 참으로 제대로의 빛을 볼 수 있고 우리가 희다라고 말하는 그 빛은 존재하는 실체가 아닌 것이다. 이 십현담의 시제가 일색과후一色過後 색을 지나친 후 다시 색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찌 색이 있던 줄을 알겠는가!